Ⅱ.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
1. 창단
1981년의 봄, 입학식을 하고 난 얼마 후 특별활동 부서를 정했는데 두말 할 필요 없이 내가 달려간 곳은 합창단이었다. 선배들이 들려 준 화음이 좋았었고, 음악실 벽에 걸린 무수한 상장이 마음 설레게 했다. 쉬는 시간에 미리 도시락 까먹고 점심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음악실로 올라가 화음 만들기에 정성을 쏟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창단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음악실로 갔었는데 오디션도 해보지 않고서, 중창단은 학예전을 대비한 2학년을 위한 자리였으므로 나는 1학년이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친구 충엽이는 형님이 있어 그냥 통과하는데 나는 노래 한 번 안 시켜 보고 탈락이라니 2학년들이 실수를 해도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합창단에서 틈틈이 노래하는 그런 시간들이 이어지던 가을의 한복판에서, 내게는 운명의 첫 손짓을 느끼게 한 의미 있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81년 10월 23일 - 그 날은 그 해 부산시 고교 합창 경연대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합창단원이 되고 난 후의 첫 무대인 것이다. 이사벨여고의 강당인 「무궁화관」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객석은 꽉 메워졌고 졸업한 선배님들까지 응원하러 나와 주셨다. 이 전에 부산진고 합창단을 6년 동안 정상에 올려놓으셨던 강수범 선생님은 내가 입학하던 81년에 중앙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다른 두 분의 선생님이 음악교사로 오셨는데 그 분들 중에서 S 선생님의 지휘로 그 동안의 연습이 이루어져 왔었다.
그런데 6년 동안의 영광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줄 누가 알았으리요! 내가 속해 있는 합창단이 최하위의 수준임은 충격적이었고, 그 소리에 감탄하던 나의 자괴감은 절로 신음을 토해내게 했었다. 여학교는 제외하더라도 출전한 남자 고등학교 아홉 학교 중에 일곱 학교에 이런 저런 명목으로 시상이 이루어졌는데 부산진고의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었다.
형용사로는 표현하기 힘든 심정이었다. 허무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엷으나마 귀가 뚫리고 이런 것은 아니라는 자각의 외침은 마음속에 고요한 파문을 일게 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두 분 음악선생님의 갈등, 연장자인 S 선생님의 치졸한 권위의식과 음악적인 면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성의 결여라고 여겨지는 부분까지!........
때를 기다렸다. 2학년이 되면서 원하던 바 합창반장이 되었고, 음악적인 부분이나마 실추된 모교의 명예회복을 위해 분투할 마음의 칼을 갈았다. 신입생을 전원 각 반별로 음악실에 불러 올려, 한 명 한 명씩 직접 오디션을 해서 합창단을 보강하고 한편으로는 그 해 12월에 있을 예정이었던 음악제에 대비하여 4개의 중창단을 조직해서 연습시키는 등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합창단 지휘만큼은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K선생님이 전근가시고 난 후 S선생님의 태도는 더욱 독단적으로 변하셨다. 이젠 학생들의 순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답보상태는 커녕, 퇴보하는 우리들의 현주소가 확연히 느껴졌다. 선생님의 한계에 학생들까지 같이 한계를 요구 당하는 것은, 또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학생자치로 연습하고 활동하는 학교도 많은데, 우리라고 계속 정체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합창단 임원들과 상의하여 선생님께서는 조금 건방지다고 여기실 수도 있었겠지만 지휘권을 넘겨달라는 부탁을 직접 하기에 이르렀다. 그 날 한참을 고민하신 끝에 뜻대로 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내가 지휘를 하면서 학생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한지 1주일쯤 되던 어느 날의 점심시간 연습 때였다. 평지보다 약간 높은 교단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렸다.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음악선생님이 서 계셨고, 나는 떠밀렸던 것이었다.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머리위로 쏟아졌고 단원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난 후 일단 물러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기상조(時機尙早)였나? 아니면 넘기 어려운 벽인가?’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는 6월이 오기까지 거듭되었다. 1982년에는 합창경연대회가 6월에 있었고 시시각각 날짜는 다가왔다. 드디어 대회 1주일 전, 그 상태로 방치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쉬는 시간에 음악 선생님을 찾아뵙고 통사정을 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내게 연습시킬 기회를 달라고.......
합창반장의 말이고 동행한 합창단 임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한 번이라는 조건 하에 기회가 주어졌다.
그 날 오후 연습시간,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흡을 맞추어 노래답게 불러보자고 했고 그에 따른 성과 또한 기대 이상으로 아주 좋았다. 그 연습 내내 지켜보시던 음악선생님께 연습이 끝나고 난 뒤 또다시 연습시킬 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사정을 했다. 이 날 연습의 성과를 인정하시는 듯 발표회 당일의 지휘는 안 되지만 연습기간의 지휘는 내게 맡기시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다. 그 일주일은 다들 너무 열심이었다. 연습시간 만큼은 눈빛들이 아주 반짝였었다. 그 속에 모두 한 마음이 된 애교심이 피어올랐다.
대회 당일이 되고 경연이 시작되었다. 순서가 되자 우리는 이수인 곡(曲) 「별」 을 부르며 입장을 시작했다. 모두 제자리를 찾아 서고 나 역시 Tenor 제일 뒷줄에 위치했다. 무난히 소화해 내기만을 기원하며 한 명 한 명의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전주가 끝이 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 완벽에 가까운 삼권분립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지휘자는 박자도 맞지 않게 외따로 춤을 추고 있고, 피아노와 합창은 각기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어쩔거나!
돌이키기에는 시간이 저 만큼 가버린 것을.......
모두들 침울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아니었는데!
제대로 연습조차 못해보고 또 무너지는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자포자기 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남고, 계속 맞서기에는 음악선생님은 갈수록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조금 시간을 가지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었다. 그런 가운데 어렴풋이 윤곽이 잡혀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만의 노래표현이라는 부분이었다. 사고는 치고 봐야 수습책이 생긴다는 믿음으로 합창단원들 중에서 마음도 통하고 노래도 제법 한다고 생각했던 4명(나, 충엽, 기모, 은배)이 모여 가칭 「부산진고 중창단」의 발표회를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었다.
옛날 그 검은 색 교복을 입고 시민회관을 찾아가 대관 하려는 당돌함도 보였으나 결국 학교의 지원이 없는 한 학교 밖에서의 발표회는 성사될 수 없었다. 문전박대 당하던 시민회관 앞에서의 씁쓸함만이 남았었다.
그 얼마 후 새로운 계획 하나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 동안 있어왔던 중창단 4개를 통폐합하고, 새롭게 뜻을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추가로 맞아들여 작으나마 실속 있고 알찬 연주회 하나를 기획했던 것이다. 부산진고 14회 7명을 자체 1기, 15회 9명을 2기로 하여 「Semi-Chorus」라는 새로운 형태의 구성을 만들었다. 그 이름을 ‘Jin Harmony'라 붙이고 늦가을에 연주회를 가지기로 합의하고 여름방학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바로 「Jin Harmony」 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한(恨)이 맺혀서인지 매일 방과 후의 연습 때 빠지지 않고 나와서 열심히들 노래했다. 그렇지만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아가야만 했다.
연주회 장소부터 구해야 하는데 교복 입은 자들에게 누가 쉽사리 문화공간을 제공해 줄 것인가! 그렇지만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발이 부어오르도록 찾아 다녔다. 다행히 학교 부근에 「초읍교회」라는 제법 큰 규모의 교회당이 있었다. 발표회장으로 사용할 적당한 교회를 찾아다니던 중에 그 곳에 들렀었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었다. 몇 번이고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던 김정광 목사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린 끝에 결국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들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된 것이었다.
장소가 교회이니 만큼 선곡(選曲) 또한 성가곡과 흑인영가를 위주로 했다. 당시에는 단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고, 후에 선교단체로 발전시키자는 의견이 대두된 적도 있었지만 음악의 다양화, 입체화와 포괄성을 위해 무효화된 적이 있었음을 참고로 밝혀 둔다. 아무튼 16명이 그야말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연주회를 진행시켜 나아갔다. 머리를 맞대고 곡 해석을 하고, 발성을 조절하고, 악상을 살리고, 셈여림을 조절하는 등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었다.
한편으로는 학생들 주머니 털어서 하는 행사이다 보니 Ticket이다 Program이다 하여 소요되는 경비가 감당하기에 힘겨웠다. 그 때 가장 힘이 되어 주신 분이 담임이셨던 ‘이인숙’ 선생님과 ‘윤평원’ 선생님이었다. 떨어진 성적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다독거려 주시며 꿈을 이루라고 격려하여 주셨다. 결국 담임선생님과 학생주임 선생님 그리고 단원들과 협의하여 입장권을 500원에 발매하여 경비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기의 나는 음악의 길로 뛰어들 것을 다짐하면서 그야말로 능력 이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