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가 대상(大賞)이란다
창단 연주회가 열리던 즈음 두 가지의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일이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은 해체의 수난을 겪은 것이고, 좋았던 일은 MBC TV가 주최한 「고운 노래 밝은 노래」에서 연말 최우수상을 수상함으로써 모교의 명예회복이라는 작은 꿈을 이루고 지금에까지 이어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 그것이다.
1981년에서 83년까지 MBC 부산 문화방송 TV프로그램 중에서 「고운 노래 밝은 노래」 라는 고등학생 가곡 경연대회가 있었다.
82년 4월에 개인적으로 출전하여 월말 결선에서 고배를 마신 적이 있어 재도전의 기회를 엿보던 중에 연주회 준비로 많은 연습을 하였으므로 82년의 마지막 예선전에 중창으로 신청서를 제출하여 막차에 합류했다. 창단연주회가 있기 전 수요일 오후에 녹화가 있었고 연주회 다음날 방송이 되었다.
출전자들은 모두가 독창이었고 우리만 중창이었다. 연습은 많이 했다고 자부했으므로 리허설은 해 볼 생각도 않고 방송국 이 곳 저 곳을 촌놈 마냥 기웃거렸다. 1등은 놓치고 장려상이 주어졌는데, 방송되던 날 우리모습을 TV화면으로 보니 우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 다음 주 수요일에는 패자부활전 격인 장려진출전 녹화가 있었고 계속해서 매주 마다 월말 결선, 연말 예선전, 연말 본선이 12월 23일 까지 이어졌다.
장려 진출전에서 1 등을 해서 월말 결선 진출권을 따내던 날이었다.
상품으로 주어진 영어회화 Tape를 들고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는 학교 음악실로 들어서는 순간, 눈이 퉁퉁 부어오른 2기 성환이의 얼굴이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연주회를 빌미 삼아 음악선생님이 그렇게 때렸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와해시키려고 애썼고 또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 분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직접 그리고 정확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전혀 모르셨던 일도 아니었고 사전에 담임과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상의 드리고 한 일이었다.
그 날 저녁, 단원 모두와 함께 음악 선생님을 찾아갔다. 나머지는 선생님 댁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동기 4명이 댁으로 들어가서 2시간을 무릎 꿇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조건 부모님을 다 모셔 오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 잘못 둔 죄 아닌 죄 때문에 음악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때에는 어떤 조치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써야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말 그대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셨다. 오죽했으면 담임선생님이 대신 내게 사과를 하신 단 말인가! 음악선생님의 말씀인즉 어찌 학생들이 음악을 핑계 삼아 돈을 벌려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삼척동자도 웃어버릴 소리에 기가 차서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요즘 같으면 문제 자체가 성립도 안 될 사안이지만 그 때는 꽤나 심각했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 후 다시 서로 모이는 것을 보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엄포로 인해 우리는 타의(他意)에 의한 해체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러웠다!
마지막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음악실에 모두 모였었다. 그 겨울의 차가운 음악실 바닥에서, 그 동안 같이 어우러져 하나를 위해 그토록 열심이던 그곳에서 모두 손을 맞잡고 처음으로 서럽게 울어야 했다. 울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건만 터져 나오는 감정의 복받침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평화의 기도」를 부르고 헤어지자 했건만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충엽이가 먼저 엎드리고, 나도 단상 밑으로 엎드리고 누구랄 것도 없이 서럽게 서럽게 울고만 있었다!
학교를 위한 일 이었다!
내 모교의 명예를 그토록 소중히 여겼건만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남들이 우리의 노래를 인정하고 우리 모교를 부러워하도록 하고 싶었으며 또 그들에게 자랑할 만한 일을 하고자 했었는데, 불량서클이니 영리목적 운운하며 ‘학생도 아니다’ 라는 식의 반응은 정말이지 참기 어려웠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래했는데, 왜!” 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 뜨거운 시간은 차라리 카타르시스였다.
점차 감정들이 가라앉고 악수를 나누며 이 다음 대학가서 못 다 이룬 음악에의 꿈을 위해 다시 뭉쳐보자고 다짐하면서 돌아서 나갔다.
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반전(反轉)을 경험하게 된다.
그 후 오래지 않아 MBC에서 촬영 팀이 학교로 온다는 연락이 왔다. 월말 결선 방송 때 삽입시킬 학교소개와 배경을 촬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끝난 일이니 그만두자고 했다. 그만큼 당했으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학교 측과 음악선생님이 다시 모여 노래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1기들이 모여 상의한 결과 다시 노래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고 촬영에 임했는데, 그 때 음악 선생님의 행동은 참 교육자 상을 생각해 보게 하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우리끼리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불쑥 나타나셔서 자발적으로 지도교사라면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마이크가 당신 앞으로 가자, 하시는 말씀이 “학생들이 본인 지도에 잘 따라주어 고맙다” 라며 스스로 지휘하고 가르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를 요구했다. 어이가 없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1기가 다시 모여 연습을 시작했다. 이젠 ‘악’ 으로라도 어떤 결론을 보고 싶었다. 월말 결선을 2등으로 통과하고 연말 예선전을 거쳐 드디어 연말 본선에 올랐다. 드디어 연말 본선이 열리던 날 - 그 날은 1982년 12월 23일 이었다. Tenor 신영조 교수님이 심사위원장으로 내려오시고 당시 부산여대 전경희 교수님 등이 심사위원을 맡으셨다. 최종적으로 본선에 합류한 팀은 남성중창이 우리 한 팀, 여성중창이 동여고 4중창 한 팀, 남성 독창이 2명 그리고 나머지 10여명은 모두가 여성 독창자들이었다.
한편으로, 연주회 직후에 초청이 있어 김해에 있는 공군부대에 특송을 간 적이 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그날은 위문공연을 가기로 되어 있기도 하여 무척이나 긴장한 시간들이었다. 그 때 부른 노래가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지금껏 불려지는 ‘Set Down Servant’ 였다.
모두들 최선을 다해 노래한 열띤 경연의 시간은 끝이 나고 이제 시상식만이 남았다. 시상내역은 준우수상 2팀, 우수상 1팀, 최우수상 1팀 등 합해서 총 4팀이 수상하게 되어 있었고, 우리는 솔직히 준우수상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부산진여고 학생이 노래를 빼어나게 잘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모두들 최우수상 후보라고 입을 모았었다. 참고로 최우수상에게는 상금 30만원과 당시 시가 125만원 상당의 피아노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수상자가 호명되었다.
준우수상 2팀이 불려졌는데 우리는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우수상 호명을 기다렸는데 그 역시 남자 독창이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모두 풀죽은 모습이었다. 무슨 낯으로 위문공연을 간단 말인가! 옆에 앉았던 삼성여고 학생이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이제 남은 것은 최우수상 1팀!
아쉽지만 누가 영예를 차지하는가에 귀를 기울였다. 그 날 사회를 맡은 김현숙 아나운서가 드디어 호명을 시작했다.
(♬♬♬♬♬ ♩) “1982년 MBC 부산문화방송 주최 「고운 노래 밝은 노래」 연말 최우수상.......”
잠시 멘트는 중단되었고, 여기까지 듣고 있던 부산진여고 학생은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 다음 순간 사회자의 입에서는 정말이지 예기치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부산진고등학교 중창단”... (♩♩♩♩♩)
모두 잠시 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다음 순간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대기실 테이블을 8명 전원이 거의 동시에 뛰어넘어 순식간에 공개홀 중앙으로 달려 나갔다. 방청석에는 응원 나온 선배, 친구, 후배들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우리는 감격한 나머지 박종정 담당 PD의 수차례의 자제요청에도 불구하고 NG를 여러 번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작으나마 음악을 통해 이루려했던 나의 작은 꿈이, 우리의 소박한 꿈이 현실로 눈앞에 보여 지는 너무나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 때의 설레임과 흥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젠 떳떳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억눌림과 가슴 답답함이 한 순간에 씻겨져 내려갔다.
기념촬영을 끝내고 위문공연을 가기 위해 타고 가던 공항버스 안에서 환희의 노래들을 불렀었다. 은은히 퍼져가는 기쁨에 찬 우리들의 화음을 운전수 아저씨도 빙그레 웃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의 위문공연도 대단한 성황이었다. 군인교회에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채 가라앉지 않은 흥분으로 우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공연이 끝나고 녹음한 Tape를 들어보니 우리 소리 같지 않은 너무나 멋진 화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그 테이프를 구할 수는 없지만 ‘다시 한 번 들어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마 이제껏 노래를 불러오면서 그 때처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생명력 있고 살아 있었던 화음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 날은 짧으나마 살아온 시간 중에 가장 화려하고, 멋지고, 신나는 하루였음에는 아무도 이의(異意)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학교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고 음악 선생님 또한 말문을 잃었다. 친구들과 주위사람들의 축하인사 -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해가 바뀌고 83년 초에 「수상자와 더불어」 라는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방송국으로부터 왔다. 이 때 또 한 번 음악선생님이란 분의 혐오스러운 면을 보아야 했다.
지도교사도 함께 출연하라고 했다며 녹화 직전에 연락해 와서는 상품으로 받을 피아노를 무조건 학교에 기증하라는 것이었다. 차분한 설명이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 명령이었다. 순수한 마음은 사라지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떻게 선생님이란 분이 자기의 권위와 체면만을 위해서 끝까지 학생들의 가슴에 슬픔의 못을 박으려 했는지 - 치를 떨었다. 좋은 사제지간을 바랬건만 그 건강한 풍토는 요원한 미래의 일이고 피교육자의 입장은 철저하게 무시되어도 좋단 말인가!
결코 수긍할 수는 없었다. 어떤 과정을 겪었으며, 어떻게 고생하며 거둔 결실인데 쉽사리 빼앗길 수는 없었다. 모교에 기증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우리들에게 상처를 심어 주었는데 정말이지 단순히 순종만 하기에는 우리들의 피가 너무도 뜨거웠다.
녹화할 때 상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어 올 것을 예상하고 공개적인 답변을 통해 확실히 하기로 했다. 녹화하던 날, 아니나 다를까 마이크를 쥔 내게 사회자가 예의 질문을 던져왔고 나는 계획한대로 답변을 충엽에게 미루었다. 다들 하나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리더를 맡은 나에게 수훈갑을 돌리고 음악을 전공하려는 내게 피아노가 없음을 들어서 우정의 선물로 전하고 싶다는 답변을 했다. 아름다운 우정이라는 사회자의 말, 앵콜송 등으로 녹화가 끝이 났다.
출연한 다른 수상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돌아가려는데 전경회 교수님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교수님을 찾아뵈니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학생들이 돈을 위해 노래를 하면 되겠느냐’ 시며 그런 정신이라면 당장 노래를 그만 두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알고 보니 음악선생님과 전경희 교수님은 사제지간이었고, 녹화가 끝나고 음악선생님의 귀엣말이 있었다고 한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박종정 PD의 힐책도 뒤따랐다. 도대체 어떤 말이었기에 아름다운 우정이 한 순간에 타락한 나쁜 놈들로 바뀌게 되었는지 지금도 몹시 궁금하다. 분위기에 눌려 조용히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방송되던 날, 그 문제의 장면은 편집되어 삭제된 상태로 방영되었다.
허허허....... 실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83년 1월에는 우리들의 화음을 녹음으로 남기기 위해 애를 썼는데 이상하게도 계기불량 등으로 녹음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상금을 받는 날이 되었다. 그 돈만은 우리가 쓰기로 하고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다가 어린 마음에 나누어 가져 봐야 몇 푼 안 되니 후배들과 멋진 파티나 한 번 하기로 하고, 촌놈들 몇 끼를 굶은 후에 광복동에 위치한 동양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점심을 뷔페로 하기로 했다. 난생 처음 가보는 호텔뷔페니 만큼 정말 양껏 먹어 치웠다. 어찌나 먹어대는지 지배인 보기가 쑥스러웠다. 하기야 나도 일곱번씩이나 접시 들고 돌았으니 교복 입은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1기 진근이는 너무 먹는다 싶더니 급기야 기모집으로 2차 가는 버스 안에서 실례를......
이것이 그 시절 우리들의 흑백사진 같은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2월 - 개학을 하고 조금 소강상태로 있는데 부상인 피아노가 학교로 도착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고 미묘한 감정의 추이가 음악선생님과 우리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음악선생님이 보자는 것이었다. 찾아가니 하시는 말씀이 피아노를 빨리 학교에 기증하면 출전한 8명 전원에게 1년간 장학금을 지급하고 당시 시가 2만원 상당의 상패를 똑같이 만들어서 줄 테니 딴 생각 말고 얼른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제 그런 약속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달리 생각해 둔 바가 있어, 그 조건에다가 앞으로 후배들을 받아들여 음악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피력과 그에 대한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기증에 최종적으로 합의를 하게 되었다.
그 다음주 월요일의 전교생 아침 조례시간 - 기상천외의 이례적인 행사가 펼쳐졌다. 상패와 피아노 증서를 학생이 학교장에게 상납하는 의식이었다. 다시 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리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기분은 상쾌했다. 피아노라는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학교를 위해 헌신했고 그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그래서 결국 우리는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도 따라 웃어주었다. 얼마 후 우리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새겨진 피아노가 도착하여 음악실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쓰다듬는 손끝으로 무엇인가 전해져 왔다. 그 무엇인가가!
고3이 되었다.
그러나 음악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살짜기 나 혼자만을 음악실로 불렀다. 당신 힘으로는 전부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으니 나만 학비를 반액 감면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교육청으로부터 학비감면 혜택을 받아 온 내게는 실상 의미 없는 일이었다. 또 한 번 속은 것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점이 아니었다. 다 필요 없으니 후배들만 영입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물의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노래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긴 줄다리기 끝에 마지막으로 갖게 된 것이 ‘단체의 존속’이라는 존재가치였다.
이렇게 해서 선발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3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들에게 있어서 3기라는 존재는 난산 끝에 얻은 자식이나 진배없었다.1)
1) 이상의 내용에서 어떤 부분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졌고 펜이 가는 대로 쓰지는 못했다. 모교에 대한 민감한 부분과 특히 음악선생님에 대한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빠진 부분은 많은 지라도, 결코 과장하거나 더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일은 선배 대에서만 그치고 후배들에게는 알리지 말자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역사는 역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