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Jin Harmony, 겨울 그리고 10년
1991년,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경북대 시절을 통틀어 가장 학업에 충실했다고 여겨지는 한 학기가 지나고 여름이 찾아왔다. 졸업학점은 거의 취득되었고, 이제 ‘계획’ 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
제대 직후에 어느 선배와의 극적인 해후, 그를 친형처럼 따랐고 믿었으며 그 선배와의 사업구상으로 인해, 취직에서 새로운 비전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멀어져 버렸다고 생각한 음악도의 길에서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새롭게 음악을 포괄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선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새롭게 펼쳐질 인생 항로에 이 한 몸 불사르리라고 치기(稚氣)어린 각오를 했었다.
꿈에 그리던 「釜山」
집에는 독립을 선언하고 모든 짐을 꾸려 부산으로 내려왔다.
난생 처음 가져 보는 내 방, 그리고 사회를 배우기 위해 우선 영업 분야에 취직을 했다. 가방 하나에 온 희망을 걸고 전국을 돌며 세일즈를 하면서 사회의 비정함도 몸으로 느끼고, 적응력을 키웠다. 91년의 여름과 가을은 그렇게 폭풍처럼 곁을 스쳤다.
이제 곧 Jin Harmony를 위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너무나 뜻밖에 그 선배의 배신으로 그 꿈은 산산이 부서져 갔다.
그토록 철석같이 믿었건만, 진정 인간을 신뢰했건만 돌아온 것은 참담한 비애감(悲哀感)이었다. 무지개를 좇은 인간의 어리석음이었겠지만 실로 청천 벽력같은 일이었다.
지금은 그 일련의 과정도 미래를 위한 통과의례였다고 확신하고 후배의 인생을 건 도전을 깡그리 망쳐버린 그 선배가 차라리 불쌍하게만 여겨진다.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평생을 두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하리라!
나는 그 선배를 용서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의 직장생활은 방황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이 정리되었을 때 또 하나의 사랑 - 그녀도 내 곁을 떠나 있었고, 직장에는 사직서가 제출되었으며, 거리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 또 겨울이다!
10번째 겨울!
그리고 겨울이면 나는 또 겨울 병 앞에 무기력해지고 만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탓일까, 세상물정에 어두워서일까?
Jin Harmony가 있음이다!
당장 방세 걱정, 끼니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그 모든 것을 과감히 10회 연주회 이후로 미루어 버렸다.
이른바 안정된 좋은 직장이 경북 구미시에 마련되었지만 제정신 아닌 듯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꿈꿔온 포부가 좌절되고 앞으로 평범한 길을 가야 한다는 상실감에서, 이렇게 온 몸으로 Jin Harmony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가장 절박한 처지에 있는 아우들을, Jin Harmony를 외면해 버릴 용기가 그때까지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들이 하나뿐인 집에서, 넉넉지 않은 집안형편이니 만큼 취직해서 부모님 봉양도 해야 하고 나이가 차니 결혼해서 손주 안길 계획도 세워야 할 입장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각도 없는 양 하나만을 향해 가는 마음은 착잡할 수밖에 더 있으랴!
더 먼 미래에 평가받으리라, 그 때 떳떳이 말하리라 마음에 되뇌이며 눈을 감아 버렸다.
또 그렇게 연주회 준비는 시작되었다.
창단 10주년을 결산하는 기념 연주회를 구상하였다.
우선 연주회장을 물색했다. 아마추어에게는 쉽사리 문호를 개방하지 않지만 부산에서는 최고의 예술공간임에 분명한 ‘문화회관 대강당’ 을 연주장소로 설정하고 대관작업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거부의 몸짓은 분명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3번의 방문을 통해 안면을 익히고, 과거의 방송출연 경력과 시민회관 대강당 공연의 자료들을 들고 가서 설득하는 한편 공직에 계시는 선배님의 협조를 구해 어렵게 대관 승인을 얻어내었다.
그러나 마지막 담당자의 한 마디는 가슴을 찔렀다.
“여기는 당신네 같은 아마추어가 설 수 있는 무대가 아닙니다. 다음에는 자발적으로 피해주기 바랍니다.”
추악한 프로보다 아름다운 아마추어가 나으리라!
관료행정이라 욕할 수도 있지만 그 때의 우리 수준과 현실로 미루어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실력, 음악적 완성도 -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 다음은 인쇄물 작업이었다.
티켓과 프로그램을 ‘서울 국제음악제’에서 힌트를 얻어서 과거보다 색조와 구도에서 한 차원 높게 꾸몄고, 포스터는 보편화된 규격으로 3,000장을 제작하여 부산시 전역에 부착하였다. 반주자도 창단 10주년 기념 연주회라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 역대 연주회의 반주자 중에서 선임하였다. 2회와 3회 연주회에서 반주를 맡았던 신의정, 8회 연주회의 반주자였던 김량희가 영예의 인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선곡(選曲)은 이 연주회가 10년의 결산이니만큼 역대의 연주회 중에서 다시 불러보고 싶은 곡들을 각 연주회별로 한 곡씩 9곡, 5회 때부터 실시해서 인기를 누렸던 Popular곡들 중에서 대표적인 4곡을 선곡했고, 우리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선배기수들 중에서 중창을 구성해서 선보이는 등 그 의미를 충실히 살렸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남성합창이라는 다소 무거운 색깔을 희석시키기 위해 동래여고 중창단과 우리 재학생을 연계하여 혼성합창 무대(지휘/5기 이광규)를 꾸며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우리의 영원한 추억의 무대 Final Stage가 자리했다.
36명의 단원이 갑자기 화려해진 문화회관이란 무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연습했고, 드디어 연주회 당일이 되고 조명이 그 빛을 발했을 때 열과 성을 다해 노래했다.
1,000명 이상의 창단이후 최대 관중이 운집했고 다소 모험이라 생각은 했지만 입장권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상하여 발매한 결과 처음으로 얼마간의 흑자를 기록하는 신기원을 이룩하게 된다. 역시 방송출연을 통해 PR도 많이 했고 부산문화방송사의 간접적 후원도 있었다.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은 부산시 일원에 지정예매처를 설정하여 운영했었는데 활용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자체적으로는 무엇인가 자리를 잡아간다는 자신감과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인지도(認知度)가 제법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했다.
Jin Harmony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과 함께한 연주회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이제 평가가 내려지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부산에서는 접하기 힘든 남성합창, 그리고 그 사실보다는 노래 속에 스며들어 있는 우리의 외침에 사람들은 공감한 듯하였다.
세계적인 그 어느 합창단보다 관중과 무대가 가까웠다는 과분한 격려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실수도 있었고 불협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감히 말하거니와 10회 연주회는 역대 어느 연주회보다 수준이 높았고 미래를 꿈꾸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동창회 선배님들의 관심과 기대도 배가(倍加)되었고, 제반의 여건도 이 연주회를 통해 많은 부분 개선이 있었다.
여분의 자금으로 수고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제는 필수로 자리한 연주회 피로연을 가지고, 부곡 하와이로 임원 MT를 다녀온 것을 끝으로 10회 연주회의 일정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공연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을 때, 가슴에 상처를 주었던 그 대관 담당자가 사인해야 할 입장인원 확인서류를 들고 와서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래에 보기 드문 성대한 공연이었습니다. 내년에도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