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무도 가라하진 않았다!
허허롭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가지는 국내에 크게 소개되지 않았던 C.C.M.을 주제로 한 16회 정기연주회의 반향이 이어졌다. 몇몇 교회에 약속한 특별연주 찬양을 핑계 삼아 망설이며 시간을 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을 학기로 맞춰 출국을 여름으로 미루고 진정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에 대한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피해갈 수 없는 IMF의 유탄에 비틀거리며 이제 더 이상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리하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향한 속내의 줄다리기인 것이다.
가지 못한 이태리 행에 대한 미련이 강할수록, 몇 달 만에 거지꼴로 돌아와야 할 미래가 너무도 명확히 보였기에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미국을 가려고 하는 내 처지라니.......
혹자는 ‘그런 마음이라면 왜 굳이 가려고 하느냐, 가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라는 조언을 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어떡하든 진하모니의 발전과 성공이 지상명령인 내가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달리 보이지가 않았다. IMF 체제하의 국가경제는 달리 뾰족한 방법론을 제시해주지도 못했거니와 경제적인 방법만으로는 Jin Harmony를 중흥시키지는 못하다는 믿음을 되씹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음악을 시작한 것은 그것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좀 더 음악을 공부하고, 음악으로 승부해야 한다.
음악으로.......
여름은 오고 난 가을학기에 맞춰서 또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포발 샌프란시스코행 KAL기는 그런 모든 상념을 이 땅에 묻어둔 채로 서울의 밤하늘로 박차고 올랐다.
다시 온 미국은 내게 만감을 교차하게 했다.
첫째는 맞닥뜨린 환경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주어진 현실이 가슴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냈다. 운전면허증 -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증이 한국의 주민등록증처럼 쓰인다 - 을 갱신하고, 학교 입학수속을 밟고, 또 아르바이트할 교회 목사님을 만나러 다녔다.
방 2개에 거실이 있는 내가 기거한 그 집은 3대가 살았다. 임 집사님 부부, 할머니, 그리고 아들 하나에 딸 하나인 가족구성이었다. 내가 그 집에 머물게 됨으로서 할머니와 자녀들은 거실에서 생활하고, 방 하나를 내게 할애해 주시는 심한 배려를 해 주셨다. 또 미국식이란 것이 자기 먹은 것 정도는 자기가 치우는 것이 관례임에도, 나를 목사의 사역을 담당할 사람으로 여기신 그 분들은 부엌 근처에도 못 오게 하셨다.
그곳은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실리콘 밸리가 가까운 곳으로 북가주(North California)에서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인데, 물가가 뉴욕보다도 비싼 곳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 당시 가장 싼 아파트 월세가 $1,400이었으니, 가난한 고학생인 내가 스스로 독립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요원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분 댁에서 그대로 지낸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나를 위한 배려가 내게는 견딜 수 없는 부담과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난 한국에서처럼 신학대학교의 종교음악과정으로 알고 왔었고, 후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까지 상의한 바 있었다. 그런데 San Jose Christian College는 아주 작은 ‘신학 대학’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해서 음악과정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만을 가르치는 학교였던 것이다.
음악과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를 미국으로 이끈 임 집사님은 내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나 대신 당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고민하던 내게 길을 열어주신다는 생각에 이 부분은 말하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속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정말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목회라니........ 이것은 아니었는데.......’
‘내겐 그런 확신이나, 계획이 전혀 없질 않은가!“
모태신앙으로 기독교집안에서 자라온 나의 머리에 ‘서원기도’라는 단어가 스쳤다. 만약 하나님과 약속이 된 문제라면 인간이 피한다고 피해질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문득 겁이 났다.
오죽했으면 한국의 부모님께 전화로 여쭈어 보았겠는가!
“나 어릴 때 혹시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서원기도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 없다!”
이젠 양심의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성가대 지휘자로 내정된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이 만남이 나의 양심에 더욱 심한 가책을 안겨주셨다. 성가대 지휘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담당할 음악전도사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철학과 음악을 전공했고, 다시 신학을 공부한다고 알려진 내가 적격자로 보이셨던 모양이다.
6개월을 교회에 제대로 봉사하면 영주권이 주어진다는 언질도 계셨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앞전 지휘자는 이 교회에서 음악전도사로 있다가 영주권을 받자마자 다른 곳의 일반 음악대학으로 도망치듯 옮겨간 모양이어서 내가 달리 처신하기는 그만큼 힘들었다.
대략적인 미국생활의 틀을 갖추고 마지막 등록을 하던 날, 난 10분의 차이로 또 한 번 제 살을 깎는 어쩌면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5단계로 이루어진 등록절차의 4가지를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등록금 문제만을 남겨두고, 미리 약속되어있던 지휘하기로 한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러 다녀왔다. 목사님은 성가대 지휘자 지원자 중에 음악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도 있지만 성가대란 것이 음악만을 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찬양이어야 한다는 아주 원론적인 식견을 갖고 계셨고, 그래서 나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음이 편할 리가 있었겠는가!
답답한 마음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당시 IMF의 여파로 아시아계 학생들은 최소 신청 학점이 조정되어 줄어 있었으며, 난 장학금을 포함해서 학기당 $330이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담당 한인 교수님이 배려해 주셨다. 그리고 모든 서류준비를 마치고 접수를 하려는데 업무 마감시간에 정확히 10분이 늦어 있었다. 정확한 미국인들 덕분에 부득이 다음날로 약속을 하고 난 뒤 임 집사님 댁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만감이 교차하고 마음은 갖가지 생각으로 난도질을 당해야 했다.
초행길이지만 용기를 내어 1시간 반 걸리는 Golden Gate Bridge로 혼자 차를 몰았다. 해질녘 샌프란시스코는 마치 불이라도 난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욱한 안개로 감싸인 도시가 어둠을 맞아 불을 밝히니 고갯마루로 올라서는 내 눈에는 마치 불바다처럼 보인 것이다. 한적한 곳에 주차한 후, 안개에 젖은 금문교의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양심이고 뭐고 그냥 눌러앉아 살 길을 찾아야 하나?’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이며,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또 어떻게 참아낸단 말인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금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양심의 가책은 어떡할 것이며, 계획한 공부와 원하는 성과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고마운 임 집사님은 날 위해 미국 시민권자인 아가씨 몇 명과 맞선을 준비해 두시기도 했고, 내가 꿈을 펼 수 있도록 나름대로 세심한 배려까지 해 주셨는데 이렇게 다시 실망을 드려야 한다는 말인가!
드디어 난 결심을 굳혀갔다.
이대로 그냥 주저앉아 있으면 난 현실적으로 양심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처럼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굶어죽고 뭇 따가운 시선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적당히 지내다가 영주권을 받고 재미교포로 살기 위해서 내가 미국에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난 가야한다!
그리고 이 고난이 끝나는 날, 다시 그렇게 원하던 이태리로 가야한다.
그곳이 내게 주어진 그리고 내가 꿈을 위해 첫발을 내딛어야 할 곳이다.
의지력 없는 놈! 즉흥적인 놈! 조삼모사(朝三暮四)하는 놈! 이란 욕을 먹어도 훗날 내 진심과 결심은 재평가 받을 수 있으리라고 난 믿었었다.
정말이지 제 살을 깎아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용기라고 믿었다.
이렇게 결심이 선 이상 하루라도 지체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굶어 죽기야 하겠는가!
난 나를 미국으로 다시 이끈 그분에게 그날 밤에 내 결심을 말씀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 하셨다. 일단 내일 다시 말하자며 그날 밤을 보냈다. 미국 이민생활이란 것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기에 일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분에게는 또 다음날 새벽에 일 나가셔야 할 그 분에게는 그날 논의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날 낮, 그분과는 상의 없이 현지 여행사로 찾아가서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결심이 굳은 이상 더 지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날 위해 시간을 비운 그 분은 나를 데리고 다시 금문교로 향했다.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갔다.
날 위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온 마음으로 말씀 하셨지만, 생각을 굳힌 내게는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지금 한국 상황을 생각해 보라?”
“여기 사람들은 한국이 앞으로 최소한 10년 이상은 힘들 것이라고 본다!”
“한국 들어가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
“꿈을 위해 나온 것이라면 최소한의 결과를 가지고 가야하지 않느냐?”
“남들은 미국에 못 나와서 안달인데 하나님의 뜻으로 두 번이나 불가능한 비자가 나왔는데, 왜 예서 포기하려는 것이냐?”
“잘못된 생각이다, 바꿔야 한다?” 등의 말들이었다.
난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아니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
암담해 하셨다.
나름대로 내게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고 기도응답을 받았던 그 분은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고 정히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예전에 지내던 St. Louis로 여행이라도 다녀와라”,
아니면 “약속을 해 두었으니 선이라도 봐라”,
그래도 들어가려면 “사람 앞일은 모르는 것이니 일단 등록이라도 하고 휴학을 하고 들어가라” 하셨다.
대답을 했다.
“제가 여행을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을 보아서 마음에 안 들면 다행이지만 행여 마음이 동하면 서로 간에 마음만 더 쓰라릴 것입니다!”,
“학교에 등록을 하고 가면 한국에서 힘들어질게 뻔한데, 그때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여지만 남을 뿐입니다!”,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결과라 하더라도 전 제 스스로 한 쪽 길을 막으렵니다!”,
“이제 다시 미국에 올 때는 연주여행으로 오겠습니다. 가서 그것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여건이 되어서 우리 합창단이랑 미국에 꼭 연주하러 오겠습니다. 그때는 정말 다시 초대해 주십시오!”,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 살기 좋은 이곳에서 당신과 이웃이 되어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 정말이지 간절합니다!”
“그때는 꼭 불러주십시오!!!”
“.............................................................!!!”
그리고 야반도주하듯 미국체류 열흘 만에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것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수모를 감수해야 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