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이별의 서곡 - 그 운명의 날
어둠속을 날아서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98년 8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이제 오랜 시간 다시 떠날 일은 없을 것 같았기에 짐을 모두 가지고 바로 부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미국에서 전화로 예원 근처에 지낼 방을 좀 알아봐 달라고 당시 총무였던 상규에게 연락을 해 두었었다.
김해공항에는 영민이가 트럭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리고 예원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 다시금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얼마간은 다시 시차적응하고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면서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돌아온 Jin Harmony의 사정은 생각과는 달리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화부족과 이해부족은 일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미국에 가기 전에 만들어 둔 것이 원로원의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 이른바 ‘선배들의 모임’ 이었다. 임원진은 있었지만 어떤 상황이 발생하거나 연주회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독단적인 처리보다는 선배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하면 보다 좋은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했었다. 그리고 결혼한 커플도 제법 되니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친목을 도모할 겸 모이면 될 것 같아서 시작한 모임이었다. 대략 1기부터 6기까지가 대상이었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 인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 모임이 결국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인지상정(人之常情)이리라!
운명의 그 날 - 1998년 9월 27일, 거제리의 지하 예원에서는 정기모임을 겸해서 선배들의 모임이 있었다. 바로 이 날의 모임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계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리요!
이 날, 향후의 Jin Harmony 운영에 대한 많은 말들이 오갔다.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부분에 대한 방법론들이었지만 대안(代案) 없는 막연한 ‘말’들에 불과했다.
의견은 난무했지만, 결코 책임지려는 이는 없었다.
‘이렇게 바꿔보자!, 저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들 했지만, 정작 의견을 낸 당사자에게 ‘본인은 그렇게 할 수 있겠냐’ 고 물으면 고개를 저었다. 본인은 못하지만 후배들이나 내가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견일지라도 그것이 행동이 따를 수 없는 단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수용할 수 있으리요!
그리고 각자 내면에는 내 두 번의 미국행에 대한 불만과 오해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불만을 가득 품은 채, 겉으로 잘해보자는 의견을 내고 있었으니 어찌 결론이 날 수 있었겠는가!
내가 돌아오고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이미 선배들 사이에는 삼삼오오 참으로 많은 말들이 오고 간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한 발 물러서 다음 연주회 때는 지휘권을 내놓고 도와만 주겠다는 미봉책으로 그 날을 마무리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이별의 시작이었다.
어떤 소명의 기회도, 이해의 노력도 없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몇 가지 사건으로 앙금이 생긴 후배들은 철저히 나를 배척하고 있음을 후에 알았다.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정말이지 대화가 부족했다.
그럴 기회만 있었어도 이렇게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서로가 오해하고 상처 주는 일은 없었을텐데.......
이전까지는 서로 이해하고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해 왔던 반대적 요소들이 있었다.
‘항상 앞으로만 가려는 나 - 현실을 살고자 하는 다수’
‘보다 완성도 있는 음악을 바랬던 나 - 쉽게 즐길 수 있는 노래를 원했던 다수’
‘이해해 주기를 원했던 나 - 설명해 주기를 원했던 다수’
‘제대로 된 합창단을 바라는 나 - 동창회 같은 합창단을 원하는 다수’
‘후배들의 입장을 대변한 나 - 선배로서의 고충을 토로한 다수’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하나!
Jin Harmony는 그 시작에서부터 불안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창단으로 시작해서 합창단으로 활동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항상 사람이 부족하고, 연주회 한 번 하기에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한다. 다른 합창단, 다른 단체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니 어찌 힘들지 않으랴!
그래도 뚜벅이 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왔었다.
우리 같은 단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이해해 줄 수 있는 이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때까지는 잘 견뎌왔었는데.......!
음악에 대한 나의 욕심(?)은 중단 없는 전진을 외쳤고, 현실속의 추억을 원하는 대부분의 단원 - 특히 사회생활을 하고 자기영역을 갖춘 선배들은 안정을 원했을 것이다. 앞서가던 내가 한편으로는 심한 부담이 되었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잠재되어 있던 불안요소와 오해들은 그 날,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옳고 그름, 선(善과) 악(惡)의 문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다만 운영의 묘(妙)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오해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던 것이 화(禍)를 불렀던 것이리라!
내가 왜 미국에서 돌아와야 했는지 설명할 기회만 있었어도, 오해의 소지가 되었던 일들에 대한 진실을 알려줄 기회만 있었어도, 대화를 할 열린 마음만 있었어도 다른 결론, 다른 오늘이 있었을텐데.......
두 동강난 파국의 후유증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그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에게조차 이 날의 일은 이미 잊혀져버린 과거이겠지만 최소한 내게는 오늘도 생생한 현재로 살아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어느 제수씨와의 전화통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마 앞으로 한참동안 얼굴보기 힘들겠구려!”
“........................................안타깝습니다!!!!!”
이후로 선배들의 모임에서 나는 완전히 제외되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노래하는 합창단 ‘Jin Harmony'에서 이탈해서 그들만의 모임을 지속했다.
들려오는 말을 다 믿을 필요도, 믿을 수도 없지만 상처받기에는 충분했다.
연락해 주는 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 주는 이도 없었다.
이미 뒤로 돌던 말들은 루머가 아닌 진실이 되었고, 정설(定說)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평행선(平行線)은 사선(斜線)이 되어 점점 더 그 끝이 멀어져갔다. 그들 몇에게 연락도 해보고, 도움 주던 합창단 밖의 선배 몇 분을 찾아가 보기도 했으나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대화만 할 수 있었어도, 설명의 기회만 있었어도 파국은 면했을 것이다. 한번 꼬인 실타래는 풀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는 이미 ‘나쁜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둠속으로, 내 안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사족(蛇足)>
세상사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합리화의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선배들이 계속 남아있었다면, 이탈리아 순회연주회가 가능했을까?’
‘만약 1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초청이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한마음으로 결정 되었을 것이다. 포기!!!
‘너무 좋은 기회지만, 우리의 형편상 불가능하다!’
어쩜, 이탈리아 순회연주회는 기존의 체재가 붕괴된 불균형이 성사시킨 산물일 것 같다. 고통 속에 핀 꽃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