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길이 있기에 간다



3월이면 Jin Harmony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어김없이 새로운 모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이 있었고, 20기가 입단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 학교 환경은 나날이 열악해져 가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절반으로 준 전교생 숫자와 이미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세태는 합창을 하기에는 절대 좋은 조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후배들은 무대 위의 화려함은 동경하나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 - 다음 해, 21기까지가 입단은 하지만 후에 19기부터 21기까지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재학시절 탈퇴하는 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그동안 Jin Harmony를 지탱해 온 전통의 생명줄이 잘리는 극한의 위기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큰 위기는 아닐지라도 이미 전조는 시작되었다.

고교재학생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그때 쌓은 두터운 인간관계가 다른 관계에 비해 지속성이 강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Jin Harmony가 지향하는 시점은 졸업 후에 있었다. 그동안 인원수급에 힘들어 했던 것도 졸업 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떠나는 이가 많을 수밖에 없는 지역적, 연령적 한계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떠나는 이는 추억은 남겨두고 떠나기에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항상 가지고 있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연주회의 ‘Final Stage'였다.


이런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고 시스템이 미처 갖추어지지 않은 여학생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졸업과 동시에 미련 없이 떠나갔고, 남자 동기들 역시 이전 세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떠나간 그녀들을 닮아있었던 것이다.

선배들은 정확히 구분 짓기는 애매하나 졸업 후에 대략 크게 2부류로 나뉘었다. 졸업 후에도 계속 활동하는 경우와 아예 연락이 끊어지고 개인의 삶을 사는 경우로 구분이 되었다. 그러나 16기 이후 기수에게는 애매한 2부류가 형성되었다. 극소수 계속 활동하는 경우와 대부분에 해당되는 Jin Harmony 활동은 접고 동기모임에는 참석하는 경우였다. 마치 남녀공학의 졸업 후 동기모임을 보는 것 같지만, 어쩌랴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내게, Jin Harmony에 동참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이미 여성에게 개방한 빗장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단초가 되어있었다. 공개모집을 통해 새로이 여성단원을 보충하고 일반합창단으로 변해가려는 몸부림을 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어긋남의 시작이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그 때 파국을 인정하고, 합창단을 해체하는 것이 나았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었다.

동문으로 하나 된 남자들과는 달리 여성단원끼리는 이질감에 뿌리 없이 흔들려 결코 하나가 되지 못했다. 기존 여성단원의 양해가 있었다고 하나, 고교동문인 기존 여성단원과 새로 가입한 나이 많은 여성단원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불완전한 동거는 한 번의 연주회(19회)를 공유하고 완전히 붕괴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나의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녀들이 무척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이용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본질은 그대로 둔 채, 외양만 바꾸려 한 나의 무모함이 부른 인재(人災)였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 내가 키워온 적자(嫡子)와 새로 들어온 서자(庶子)에 대한 암묵적 구분이 있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더욱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강하게 든다.


이런 내부 진통을 겪고 있을 즈음, 한 줄기 서광이 비쳐왔다.

바로 이탈리아에서의 전화 한 통이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고 새로운 전환점이 절실하던 때에 들려온 소식은 기쁨 그 자체였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연장된 삶에 지쳐있던 가까운 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후 진행되는 이탈리아 순회연주회와 관련된 내용은 따로 언급이 되니 이 장에서는 건너뛰기로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 순회연주회는 처음부터 남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으니 여성단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겉으로는 실력이 안 되니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안 꾼다고 했지만 그 속마음들이야 오죽했으랴!


이즈음,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J양이 Jin Harmony에 합류하는데, 향후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2번의 이탈리아 순회연주회도 그녀의 도움이 지대했다. 자기 개인 돈 써가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녀를 볼 수가 없다. 그녀가 조금만 시선을 따로 두고 말을 달리 했더라면 지금쯤 많은 것이 변해있을 것인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말이 화(禍)를 불러 수고한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멀어져야 했던 것은 서로에게 안타까운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수고에 감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폄하할 마음은 결코 없다.

다만 진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왜곡(歪曲)될 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연은 후에 미칠 영향이 막대함으로 나중에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 여름, 한 편에서는 Jin Harmony의 창단 19주년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11월 20일이 창단기념일이니 그 주 토요일에 행사를 갖기로 하고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었다. 우연히 찾아온 2기 J군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져서 다시 선배들과 연결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송정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을 빌려 1박 2일동안 행사를 갖기로 하고 여러모로 준비를 해갔다.


그러던 9월에 전편에 언급한 19기 남학생들의 경사가 있었다.

9월 23일, 부산시 청소년 중창대회가 열렸다. 해마다 이 대회의 대상은 우리가 독식하고 있었으나, 이번 해 만큼은 예외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참가하는 기수가 19기였기 때문이었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나 처음 들어올 때 그 쉬운 제창(齊唱, Unison)도 안 되던 기수였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고교 2학년을 내보내던 것이 전통이었기에 대타는 있을 수 없었다.

19기를 불러 모아 회의를 했다.

“등수를 떠난 연습기간 동안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느냐?”

“예!!!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거의 한 달간 특훈을 하고 대회에 임했다.

이전에는 대회가 있으면 많아야 2주 정도 따로 연습했지만, 기수가 기수인지라 조금 더 시간을 연장해서 연습한 것이다. 출전에 필요한 2곡을 그야말로 피눈물 나게 연습을 시켰다. 절대적 노래실력이 모자라니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야말로 감정표현을 조각내어 다시 붙여가며 하나씩 만들어갔다.

대회 날, 우리를 이겨보겠다고 벼르던 몇 팀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었다. 대회는 진행되었고, 그 어느 해보다 손에 땀을 쥔 채 지켜보아야 했다. 노래 실력으로만 보면 월등한 팀이 여럿 있었다.

드디어 우리의 차례!

연습한 대로만 무대에서 편하게 부르라고 등을 쳐주며 무대로 올려 보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 19기들은 연습한 그대로를 무대 위에서 그려갔다.

접전이 끝나고 심사평이 이어졌다. 심사위원장의 말에서 어느 정도 예감이 되었다.


“어떤 팀은 고등학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감정표현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팀, 한 팀 수상팀이 호명되는데 일찍 불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특별상, 3등, 2등은 다른팀이었다. 남은 것은 1등과 대상.

1등을 부를 때 가장 긴장이 되었다.


“1등상!..........................................................K고 솜”


안도의 한 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예전에 한번 노래로는 1등이라고 자타가 공인했으나 심사위원들의 나눠 먹기식 분배로 ‘특별상’을 받아서 어린 마음들에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남은 수상팀이 한 팀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만큼 자신감도 있었다.


“대상!..............................................부산진고 진하모니!!!”

“축하합니다!”


애들 잔치에 무슨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날의 수상은 내게도 특별한 것이었고, 가장 값진 기쁨이었다. 이 날 만큼은 19기가 주인공이었다.


가을은 깊어가고 준비한 창단 19주년 행사는 다가오는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9기 L군의 결혼식이 같은 날 잡힌 것이다. 미리 연락만 했더라도, 홈페이지를 들어와만 보았어도 중복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한다는 소식에 기뻐할 수만 없었던 것도 이런 난감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신부가 2년간 우리 반주를 한 K양이었기에 더욱 난감했다.

하지만 거금의 자금이 선배들로부터 모금되어 창단 후 처음 열리는 큰 행사였고, 멀어진 선배들을 2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기에 우선순위를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행사 당일 결혼식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할 수밖에 없었기에 아마 지금도 마음에 앙금이 남았으리라 여겨진다.

말로는 미리 알리지 못한 자기 잘못이니 괜찮다고 했지만, 어찌 괜찮겠는가!

신랑은 신랑대로, 신부는 신부대로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그 날 저녁 행사장으로 찾아와 잠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L군, 이 글 보고 있다면 연락 한 번 하시게! 내가 미안하이! 이제 그만 섭섭해 하시게!”


부부동반, 자녀동반으로 선배들이 모여들고 20기까지 전 단원이 한 자리에 모이는 뜻 깊은 창단 19주년 행사가 11월 25일, 송정 청소년 수련원에서 열렸다.

오래간 만에 서울서 내려와 얼굴 보게 된 K, 부산에 있었지만 못 보고 안 봤던 다수의 선배들, 전국에서 제법 많은 숫자가 모였다.

뭐가 못마땅해선지 내가 한 성질 부리기도 했고, 13기 Y군은 미숙한 운전솜씨로 선배차를 빌려 타다가 또 다른 선배차를 들이받아 여럿을 난처하게 하는 등 몇 가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체육대회, 장기자랑, 출장 밴드를 불러 가진 여흥시간, 재학생 재롱잔치, 기수별 상견례, 오래간 만에 불러보는 Final Stage의 합창, 마지막으로 캠프파이어까지 진행이 되었다. 식사는 단체식으로 주문했기에 별다른 소모시간 없이 잘 들 어울렸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술잔이 오가는 진솔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기대만큼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항상 겨울에만 모여 노래 하다가 처음으로 전 기수가 함께 모여 가진 여흥의 시간이었다. 비록 그동안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하는 역할까지 해 내지는 못했지만, 이만큼도 그간의 사연을 돌이켜보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다시 보자며 헤어진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이 행사를 끝맺었다.


또 겨울이다.

어김없이 연주회 준비는 시작되었는데, 앞서 언급했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Jin Harmony의 정기연주회 날짜가 매년 2월에 정해진 것은 재학생들의 학사일정을 고려한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무대에 함께 하게하기 위해서는 2월이 최적의 시기였다. 그때까지 고3이 되는 기수는 연주회를 끝으로 1년간 활동을 접고 학업에 전념하는 것이 전통이었고, 불만을 제기하는 기수가 없었다. 무려 18년 동안의 전통을 깨고 19기들이 항명을 한 것이다.


무대에 서질 못하겠다는 것이다. 계속 강요하면 탈퇴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당시의 나나 선배들이 보기에 이 녀석들의 항명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런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19기들이 1명을 제외하고 전원 탈퇴를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나가버렸다.

어쩌랴! 시대적 흐름인 것을!

19회 정기연주회 사진을 보면 인원이 많이 줄어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전에 절반을 차지하던 재학생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20기는 처음부터 인원이 적었을 뿐더러 한두 명씩 사라져 결국 1명만 남았고, 19기도 집단탈퇴 후 남은 것은 1명이었기에 결국 재학생 2명만이 무대에 선 연주회였다.  


다시 나타난 선배 몇 명이 자리를 메우고, 새로 가입한 여성단원들이 함께하여 겨우 연주회 인원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욕심은 또 다른 시도를 무대에 펼쳐보이도록 자극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 아닌 차별이었다. 이 연주회 역시 세 번째 무대에만 혼성으로 참여한 것이다.

주 무대는 한국가곡, Popular 연작, C.C.M., Final Stage로 구성되었다. J양이 인맥으로 섭외한 소년소녀 합창단이 찬조출연 했고, 이탈리아 순회연주회를 대비해서 부산대 사물놀이 팀을 게스트로 초청하기도 했다. 선배 K의 지인 자녀를 곡 중 솔로로 참여시키는 다양함도 있었고, MBC 악단의 반주와 바이올린 연주자 정영숙양도 또 한 번 자리를 함께 했다. 지금은 12기 O군의 부인이 된 주은정양이 새로운 반주자로 섭외되었고, K라는 1명의 반주자가 추가 되었다.

매 번 도움 주는 이가 많지만, 의사 가운을 입은 후로는 빠지지 않고 무대에도 함께 했으며 특히 당시 단장을 맡아 수고한 3기 L의 도움이 컸던 연주회였다.


2001년 2월 24일, 문화회관 대강당에는 우리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먼저 기억되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못한 모습이다. 관중들은 거의 몰랐겠지만 - 모르길 바랬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 반주자 K의 실수가 많이 힘들게 했다. 첫 무대부터 악보를 빠뜨리고 와서 우왕좌왕하고 장고반주와 엇갈려 박자를 놓치더니 이 때문에 당황하였는지 그 뒤로도 계속 헤매는 것이었다. 지휘자를 보지도 않고 악보에 코를 박더니, 매번 사인도 주기 전에 전주에 들어가는 등 그녀로 인해 연주회 내내 불안함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첫 무대는 한국가곡이 역시 장식했고, 반주자와의 불일치를 제외하곤 무난했다.

두 번째는 심혈을 기울인 Popular Stage였다. 군(軍)을 주제로 한 4곡을 스토리 있게 편곡하여 배치하였고, 경쾌한 팝송 한 곡을 후반부에 배치하여 흥을 돋웠다.

먼저 바이올린 선율이 녹아 든 ‘날개만 있다면’이 Kid Solo와 함께 했고, 유명한 ‘이등병의 편지’가 바이올린과 하모니카에 편승하여 관중 일부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짧은 멘트에 이어 군가(軍歌) Medley가 MBC악단과 함께 관중을 압도했는데 특히 예비역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끌어내었다. 뮤직비디오를 언급하며 부른 조성모의 ‘아시나요’가 낮게 깔린 스모그 효과에 얹힌 바이올린의 곡조에 녹아 좌중의 가슴에 애잔함으로 전달되었다.


잠시의 짬을 둔 후, MBC 악단과 Flute의 반주에 부른 ‘California Dreaming’은 관중들에게 중간휴식 후의 2부를 더욱 기다리게 했다.

휴식후의 세 번째 무대는 예의 C.C.M. 무대였다.

역시 MBC 악단이 반주를 맡았는데, 이번에 특이한 것은 빌려온 성가대 가운을 갈아입고 보다 C.C.M.의 성격에 맞게 접근해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점점 빨라지는 곡 배치의 끝에는 영화 ‘Sister ActⅡ'에 삽입된 ’Joyful, Joyful‘을 편곡하여 댄스와 함께 선보였다. 이 한 곡을 위해 단원들은 무던히 춤 연습을 해야 했다. 결국 춤이 안 되는(?) 단원은 단상위의 자리로 배치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단원은 곡 중 솔로를 부르는 전반부에 밖으로 빠졌다가 리듬이 빨라지고 다시 조명이 밝아지는 부분에서 덤블링과 함께 등장하는 영화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 한 곡을 위해 티셔츠도 맞추고 소품도 준비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아쉬운 것은 음향이었다. ‘개인용 무선 마이크만 모두 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도 아마추어의 무대요, 저예산의 빈약한 구성이었지만 최선 아닌 차선의 효과는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Final Stage.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바뀌었지만, 노래는 흐른다. 추억의 그 노래들은 언제 불러도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하지만, 이 날의 느낌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전무(全無)했던 선배들의 빈자리가 조금은 메워졌건만, 아래로 더 크게 뚫려버린 여백은 시지프스의 자화상인 것만 같아 씁쓸함을 지울 길 없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긴 공연시간이었지만, 중간에 이탈하는 관중 없이 진행되었고 후일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평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편성의 승리였던 연주회로 기억될 것 같다.


아래위로 구멍 뚫린 Jin Harmony지만, 이제부터는 이탈리아 순회연주회 체재로 전환하여 새로운 장을 여는 도전을 위해 준비해 가게 된다.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