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제는 서야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은 대구로 진학하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간판도 있지만, 경북대학교 철학과 - 그것이 나의 간판이 되었다. 비록 태어난 곳이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가기 싫었던 대구에서의 대학시절은 외로움 그리고 현실과의 싸움이었다.
기숙사 생활, 그 나트륨등 밑으로 그렇게 또 세월은 흘렀다.
대학생활은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는데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일터로 뛰어야 했으며 어떤 때는 수업까지 빼먹곤 했었다. 학교 본관에서 민원실 업무 병적 업무를 도와주고 서클과 동문회들을 관장했던 '행사협조처'라는 곳의 업무를 위주로 하여 학생회관 강당의 조명기사, 기숙사에 신문 돌리기, 책 외판사원 노릇, 시험 부감독, 차량 실태조사, 방학이면 학생 방범대원과 교통정리 등 정말 여러 종류의 일들을 했었다.
재미도 있었지만 무척 바쁘고 힘든 나날이었다. 전공인 철학(哲學)에 심취해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아쉬웠다. 그러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고는 했다.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 Jin Harmony였다.
1985년의 가을 - 자금 문제 때문에 다시 한 번의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각오하고 이번에는 1, 2기가 합동으로 일일 찻집을 했다. 서면 ‘다향전 다방’을 빌려서 개최하였는데 고생의 대가로 5만원의 이익금이 생겼다. 저번에는 10만원이 적자였는데, 이번에는 5만원씩이나 남았으니 대성공이라며 한참을 쓴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 Jin Harmony에서 ‘일일찻집’ 을 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계획한 4회 정기연주회 날짜가 다가왔다.
이제는 무리를 감수하고라도 규모를 키워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12월의 어느 날, 3년 전에 교복입고 대관 하러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던 시민회관을 다시 찾았다. 1기 기모랑 둘이서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들어서니 옛날과는 대우부터가 달랐다. 일은 벌리고 봐야 해결책이 나온다는 예의 그 단순 무식함으로 시민회관 소강당을 계약하고 연습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연습장소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모교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인가를 요청하기에도 시기상조인 것 같아, 오늘은 이 교회에서 연습하고 쫓겨나면 내일은 저 교회라는 식으로 동냥하듯 떠돌았다.
3회 연주회와는 달리 4회부터는 성가곡 위주에서 탈피하여 여러 장르를 섭렵하려다 보니, 유일한 연습공간이었던 교회와는 상치되는 부분이 많아 더더욱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타협하지 않고 힘든 길을 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제4회 정기연주회에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유료 입장권(₩1,000)을 발매하여 주머닛돈들을 터는 짓만은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건만, 어쩔거나 또 적자인 것을!
재정적인 출혈과 후유증은 뒤따랐지만 규모면에서는 일단 성공이었다.
하지만 연습부족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음악의 내용 면에서는 퇴보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대에 섰던 인원만큼 모여서 연습한 것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으니 어쩌면 그것은 관객모독이었을 것이다.
수고했다고 선배들 주머니 몽땅 털어서 부산대학교 앞에서 칼국수 한 그릇씩 먹이고 돌아서 나오는데 가만히 다가오는 것은 회색빛 슬픔이었다.
그 숱한 무덤 가운데 이유 없이 누워있는 이가 있겠는가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놈들이 어찌 그리도 연주회에 무덤덤할 수 있었는지 통탄할 노릇이었다.
어찌 하겠는가!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