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런 노래면 어떨까?
정감 어린 사람들이 모인 Jin Harmony, 그들은 노래를 한다.
예술이라 하기에는 아직은 초라하고, 미흡한 아마추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다. 또한 단순한 동문들의 모임이라고 규정하기에는 그 속에 위치한 노래의 비중이 너무나 커 보이고, 회피하고 싶은 때가 너무도 많았지만 외면해 버리기에는 지나가 버린 노래의 상흔들이 쉽사리 우리를 놓아주질 않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어떤 과정과 갈등을 겪었다 할지라도 이제 ‘우리는 노래해야 한다’ 는 것은 當爲의 명제로 자리 잡았다.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고 영국의 등산가 힐러리가 얘기했듯이, 노래가 있어 우리는 노래한다. 감각과 가치관이 미처 갖추어지지 전에 노래를 접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노래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어느 분야, 어느 시공간에나 음악은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제 보다 체계적인 연주활동과 특색 있는 음악, 그리고 차별화 되는 음악적 위상을 향한 의견을 제시하고 그 가시화를 향한 노력을 촉구한다.
음악의 본질은 ‘快’ 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참여가 자의적이고 애정을 수반하고 있다면, 노래가 각자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고통을 안겨준다고 하는 것은 자체의 구조적 모순을 차치하고라도 Jin Harmony 가족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노래는 ‘音’ 의 연결이고 이 ‘音’ 은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어찌 보면 한 순간의 절정을 위해서 그 숱한 시간들을 노력해야 하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인 것이다. 그 과정 역시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어떤 흡인력이 그런 모순되고 비경제적인 반대급부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수많았던 인물과 무대들을 창출해 내고 있는가?
내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는 그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투쟁하듯 음악에 부딪쳐 온 경험에 국한시켜서 我田引水격으로 이해한다면 -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하고 슬픔조차 희석시켜서 그 진면목을 발견하게 하는 것 같다. 세상사의 목적의식과 이해타산의 법칙에 지배되어서는 본질이 변형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일차적으로 음악을 만들어 가려는 의지와 만들어지는 화음을 향유하려는 열린 의식이 선행되어야겠다. 이 만큼을 투자하면 저 만큼의 수확이 있을 거라는 식의 계산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고 종국에는 도태시키고 말 것이다.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가득할 때, 음악은 잔잔한 미소만을 보내고 있지만 삶에 찌들고 슬픔의 심지가 가슴속에 불을 켤 때, 음악은 적극적으로 다가선다. 누구나 힘들고 괴로웠던 때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 때 스며들던 애잔한 선율의 느낌을 반추하면, 사연은 새롭게 느껴지고 가슴 밑바닥까지 저며 오는 끈끈한 ‘悲哀美’ 가 전해졌을 것이다. 음악을 음악 그 자체로, 다시 말해 음악을 위한 음악을 추구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위를 서성이고 있는 슬픈 가락에도 애정을 느껴야 한다.
차분히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자답해 보자.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나마 음악을, 노래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지!
아마 노래를 싫어한다고 할 만한 모진 구석은 없으리라!
생활 속에서 호흡하는 공기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듯 언제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음악의 끈끈한 작용을 십분 받아들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實在와 작용은 분명 인정되어 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음악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냥 피동적으로 흐르는 음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같이 만들어 가는 공동의 화음을 추구한다. 음악은 좋아한다고만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쓰라림도 맛보아야 하고, 때로는 한계도 절감해 가면서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굳힐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지향하는 따뜻한 화음이 영글어 가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막연히 음악에 대한 동경만으로 지탱해 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감이 아닌 자만심이 우리를 지배했고, 용기 있는 동참이었다기 보다는 치졸한 이기심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고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강조하고 확신하는 바, 음악은 저 먼저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이 인간의 도전에 대해서 응전하지 않고 그 保全의 노력에 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포근함을 안겨 주듯이, 음악 역시 사랑하려 노력하는 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음악은 사랑이고 造化이고 情이다. 어쩌면 음악은 ‘理想’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상과 현실에는 불가분 괴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을 무시하고 살수는 없으나 현실만을 좇아 산다면 돌이켜 무엇이 남을 것인가! 개인주의의 팽배가 남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으나 작은 부분 그러지 않으려는 몸짓이 바로 우리들의 만남, 우리들의 노래가 아닐까 한다.
할 일 많은 세상 - 나를 부르는 곳 많고, 내가 가야 할 곳 많지만 정작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드물다. 삶의 무게가 드새게 어깨를 눌러와도 만나 웃으며 털어 버릴 시간도, 공간도 있어야 한다. 음악을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 동안 우리는 참다운 음악을 몰랐던 것 같다. 이제 진한 음악에의 애정을 가지고 노래를 불러보자! 인위적으로 연출되는 노래를 넘어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음악을 창출해 보자! 틀을 깨고 일어나자, 언제까지 웅크리고만 있을 것인가! 종래에 이별연습의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노래해야 한다. 가슴으로 노래하고, 뜨거운 피로 노래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력은 노래로 어우러지는데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꿈꾸는 그 날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 가슴들을 열고, 손에 손을 맞잡고 우정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제 조금은 구체적으로 Jin Harmony가 추구해야 할 음악세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의 만남은 필연에 기인해 있지만 음악을 통한 교류는 그 필연을 넘어서 있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순수를 지켜가며 자유를 사랑하면서 행복에 도달해 가기 위해서 예술은 또 음악은 그 근원적 원동력을 제공한다. 사실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과 당분간의 우리 음악은 기존의 편협한 틀을 벗어나기 힘들겠지만 머지않은 장래에는 우리 특유의 음악세계를 가져야 할 것이고, 또 갖게 될 것이다.
정형적인 고전음악에만 치중해 나가도 동조를 얻기 힘들 것이고, 반면에 지나치게 말초적인 대중성을 지향해도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양자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창의적이고 고유한 음악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 음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면서, 언어로 또 행동으로는 표현 못할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절대 音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몸부림으로라도 느끼고 행하려 노력하려 애써야 한다. 다소 형이상학적인 소리이긴 해도 음악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하는데, 뿌리 깊고 국적 있는 음악에 대한 의식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선상에 놓여 있어야겠다. 기존의 매 연주회 레퍼토리 중에 한국민요가 몇 곡씩은 꼭 들어있었던 것도 그러한 생각의 실천이고,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서도 이런 노력은 지속적으로 경주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시도들(기 편곡된 민요악보들과 연주형태)에서 다양한 실험성과 창의성으로 ‘민족음악’ 을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서양음악에 길들여진 세대의 귀에는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 고유의 음악은 가락과 리듬을 주로 하고 있지만 정형화된 서양음악은 和聲이란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작금의 시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양음악과 민족음악이란 구분이 불분명하다. 교육의 편파성으로 인해서 서양음악이 고급문화요, 발전된 형태의 음악이란 인식이 팽배하며 심지어 민족음악(흔히 國樂이라고 인식되었으나, 그 의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학계에서 수정을 시도한 용어)은 구시대의 유물인양 찬밥신세를 당하고 있는 것도 일견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음악은 그 민족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역사성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 역사적 산물인 민족음악을 등한시 하는 것은 뿌리의 상실이요, 자기 부정이라는 모순을 내포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서양음악의 형태에 정통하더라도 그것은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일본이 아무리 김치를 잘 만든다고 해도 우리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반면에 오늘날의 세계는 문명의 발달로 인해 그 색깔과 진행속도를 같이 하는 등 유사성을 보이는데 결국 그 와중에서 고유한 빛깔을 간직하고 발할 수 있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의식만이 우리의 음악이, 우리의 노래가 나아갈 방향점이 될 것이며, 스스로의 한 차원 높은 자리 매김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제는 보다 감각적이고 상상하기 쉬운 미래의 우리 모습을 비유적으로 상정하여, 지금의 형태가 발전하여 실현 가능한 최소한의 무대 구성과 음악의 단면도를 예시하여 본다.
선천적인 음감각을 지니고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서 완벽에 가까운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있고, 세월이 흘러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킨 우리의 모습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전자의 음악은 빼어난 화음을 뿜어 낼 것이나, 우리의 노래는 그러하지는 못하리라. 백발의 할아버지에서 홍안의 소년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의 개성이 모여 엮어지는 노래는, 더러 가사와 음정도 잊었을 것이고 군데군데 불협화음도 섞여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음악다운가?’ 라고 질문한다면 분명 전자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라고 질문을 바꾼다면, 주관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우리의 모습에 표를 던지고 싶다. 비록 덜 조화된 음악이라 할지라도 수십 년의 세월을 그 풍파, 온몸으로 받아 내고 지켜 온 그 때의 우리 모습이 더 감동적이고 음악다울 것 같다. 어쩌면 그 모습이 인생 파노라마요, 삶으로 대변되는 음악적 아름다움일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는 연륜을 노래하고, 패기만만한 젊은이는 의지를 뿜어내고, 소년들은 꿈과 희망을 내어 보일 것이다. 그러한 노래는 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청중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참여한 모든 이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나눠 줄 것이며 또 자유와 평화를 공유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