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 시민회관 대강당이여!



푸른 제복과 함께 했던 시간들도 세월 속에 묻혀 지나가고 전설같이 여겨지던 전역의 날이 내게도 찾아왔다. 그 날, 과거에 그토록 선망했던 희망의 도시 서울을, 동기들의 술자리 권유도 뿌리친 채 도망치 듯 빠져나왔다 (부대가 서울 근처에 있었다). 이젠 숨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구 집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창밖의 어둠 속에 수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났다.


- 휴가를 모두 Jin Harmony와 함께 했던 일, 김포공항 근처에서 군 생활하던 충엽에게의 삼고초려(三顧草廬), MBC ‘인간시대’ 담당 PD와의 무모했던 담판과 거절 후 돌아섰던 그 씁쓸했던 기억, 휴가 나온 선배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대던 어느 후배의 차디찬 금속성 목소리 -


이런 저런 젊은 날의 조각들이 어둠 속에 묻혀 갔다.


89년 가을은 부산에서 사업하던 선배의 일을 도왔다. 그 어떤 가능성에 스스로를 맡긴 채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던 날들이었건만 결과는 사업실패라는 아픔을 남기고 선배는 나름의 길을 찾아 떠나고 나는 또 겨울 속에 나뒹굴었다.


겨울, 또 겨울이다!

찬바람은 속살을 파고들고 기거할 곳조차 없건만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생각했던 제8회 정기연주회는 목전에 닥쳐 있으니, 대구 집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절박한 사정을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운명치고는 피하고 싶은 처참한 것이리라!


시민회관 대강당이라는 규모 확대를 기획한 8회 연주회 준비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아울러 지금까지의 홀로 서기 중에서 가장 참담했던 나날들이 병행되었다. 그나마 다행은 1기 충엽이의 어머님께서 운영하시는 고은유치원이 연습장소로 제공되어서 걱정 하나는 면하게 된 것이었다.


89년 12월 한 달 - 미련스러웠다고 할까, 철이 없었다고나 할까!

복학하기 전의 기간이니 전력을 다한다고 다짐은 했었지만, 그 다짐을 지속하기에는 너무 춥고 배가 고팠다. 오후에 연습을 시키고 뒷정리하고 다음 날 준비를 상의하고 나면 혼자가 되고 밤거리를 방황하는 집 없는 천사가 되어야 했다.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정이 가까우면 찾는 곳이 심야 만화방, 그 곳이 가장 싼 가격에 하루 밤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침 7시까지 소파에서 뒤척이다 보면 주인이 청소를 시작하며 눈치를 준다. 영업이 끝나는 시간이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천원짜리 지폐가 들어 있는 날이면 근처의 목욕탕을 찾아서 밤새 추위에 얼어있던 몸을 녹이고 한 숨 눈을 붙였다. 그나마 목욕탕을 가지 못하는 날이면 오후연습까지가 막막하기만 했다.

현대판 성냥팔이 소년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연주회 기금마련을 위해 기획된 것이 이른바 ‘Dinner Show’ 였다. 혹자는 또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답답해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으며 연주회 자금을 충당할 달리 무슨 방도가 없었다. 열띤 난상토론 끝에 과반수로 추진을 결정하고 실무작업에 착수했다.

서면 복개천에 있었던 ‘코이노니아’ 라는 레스토랑을 빌려서 식사도 하면서 공연도 한다는 형식이었는데 울며 겨자먹기 식의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89년 12월 26일 저녁, 1인당 ₩15,000의 이 유료 Show는 완전히 실패작으로 막을 내린다.

지금도 화가 나는 것은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이다. 회의 때는 반대하고, 티켓을 한 장도 팔지 않기에 비협조적이라고 원망을 했었는데, 당일 날은 온 가족을 다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길래 깊은 속마음을 모르고 오해했다고 속으로는 무척 미안해했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사라져서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xxx.     차라리 오지나 말 것이지.....!


조금 모아 둔 회비마저 날려버리고 몇 몇 단원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 이틀 뒤 실망한 서로를 위안하자고 가진 송년모임은 회비의 부족으로 1기 충엽이의 주머니를 한껏 유린한 채 끝이 났고 89년은 또 그렇게 저물어 갔다.


연말연시를 대구 집에서 보내고 내려오니 충엽이랑 3기 지호가 보기 하 딱했던지 부암동 언덕배기에 자취방을 얻어 두었다. 조그마한 방이었지만 친구, 후배에게서 느껴져 오는 따스함에 눈물겨웠었다.

‘부암고시원’ 이라 명명된 그 방에서 연주회는 착실히 진행되어 갔다.

새벽녘에 한기(寒氣)가 느껴지면 악보를 품에 안았고, 부지런히 날라져오는 식량공급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극도의 긴장으로 굶기를 더 자주 했다. 또 감기에 걸려서 여러 날을 고생했는데 매일 고함을 지르다 보니 목에선 피가 나고 회복이 잘되지 않았다. 그 때 살짝 내밀어 주던 후배 6기 동화의 손에는 약봉지가 쥐어 있었고, 약효보다는 정성어린 서로의 감응으로 쾌차하였다.


연주회 연습 도중에 이런 말을 가끔 했다. 2회 연주회 때 울어보고는 아직 그만큼 슬픔의 무게를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번 연주회가 끝나면 정말 힘들어서 통곡할 것 같다고!

연주회를 이틀 앞둔 연습이 끝났다.

그 날 따라 2기 성환 이도 서울에서 내려오는 등 제법 인원이 많아서인지 몇 마디 얘기를 덧붙였다. 수고한다고, 최선을 다하자고, 정성을 다하자고 당부하고 앵콜곡으로 선정된 ‘사랑으로’ 를 불렀는데 그 선율에 참아 왔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남들에게는 이유가 설명이 안 되는, 또 이해가 안 될 그런 숙연한 분위기였다.


드디어 <Jin Harmony 제8회 정기연주회>가 90년 2월 10일에 그토록 갈망하던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리게 되었다. 

Dinner Show의 실패이후 동창회와 접촉을 했었는데 처음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어 입장권을 초대권으로 발매한 공연이었고, MBC-TV의 문화채널인 ‘부산 부산문화’ 에 전 단원이 출연하여 노래하고 인터뷰도 하였으며, 역시 MBC - Radio ‘별밤’ 에도 다시 출연하여 이른 바 ‘방송출연’을 통한 최대의 광고효과를 노린 연주회였다.

아울러 5회 연주회 이후로는 연주회마다 포스터를 제작해서 부산시 전역에 부착해 왔는데 8회부터는 비록 형식상의 절차지만 ‘MBC부산 문화방송’ 이란 명칭을 후원사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대외적 신뢰도를 한 차원 높이게 된다.

물론 겨울이 되면 아우들은 포스터를 들고 부산 시내를 다 돌아다니며 경찰관 아저씨들과 숨바꼭질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임무를 부과 받은 것도 부담이었겠지만!


리허설을 하기 전에 혼자서 먼저 무대로 나가 텅 빈 객석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감동이었다.

그렇게 원했던 무대가 아니었던가! 후에 문화회관 대강당으로 규모를 키웠고 또 앞으로는 더 화려하고 멋진 무대에 서게 되겠지만 그 날의 감격만큼 기쁨이 크진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 그 이전에 꿈꿔왔던 최고의 목표 - 당시로는 시민회관 대강당이 최고의 무대였다 - 를 달성했다는 성취감과 아마추어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한 감동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날 따라 때 아닌 겨울 소낙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꽉 찬 관중석을 기대했던 우리에게는 악재로 작용하여 조금 빈 객석도 있었지만 그윽한 시선을 보내주시는 분들과 더불어 멋진 연주라기보다는 감동적인 무대는 연출할 수 있었다.

순서가 다 끝나갈 때 우리 모두는 무대 앞쪽으로 나와 손에 손잡고 ‘사랑으로’ 를 관중과 함께 합창했다.

무대 위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기일 다 미루어두고 실무를 담당하며 고생했던 지호가 통곡했고 뒤이어 대부분 단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수경례를 붙이는 아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울고 있는 아우들과 슬프지만 아름다운 교감을 나누었다.

남자들끼리의 그 이상한 모습을 보았던 관중들은 조금 의아하긴 했겠지만 잔잔한 감동은 전해졌을 것이다.


막이 내려지고 대기실로 나가 보니 충엽이가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모두들 한 순간의 절정을 위해 너무나 많은 부분을 내어 던졌던 것이다.

남은 것들을 마무리하고 시민회관을 돌아 나오니, 아직도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앞쪽 계단에는 전 단원이 가지 않고 모여서 그 비 다 온 몸으로 맞으며 추억의 노래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바리 코트에 두 손 쿡 찌르고 밤하늘을 우러르니 빗물인 것도 같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이 맛에 우리는 겨울이면 죽어라 노래하는 모양이다.

이 처절한 슬픈 아름다움 때문에!


제도권 음악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음악을 업(業)으로 삼은 사람이나 여건이 허락하여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은, 연습에 있어서의 우리 단면이나 모임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노래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고등학교 때 닿은 인연을 나이가 들고 환경과 여건이 바뀐 상태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 간다는 것은 일견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은 수업이나 앞으로 밥줄이 될 것이니 꼭 해야만 할 테고, 어머니 합창단이나 음악 동호인 모임 같은 곳에서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여건이 조성된 상황에서 여가선용 혹은 인생을 즐긴다는 차원에서 노래를 하고 모임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입단하면 대학입시가 눈앞에 있고, 대학 진학하면 군대문제, 그 다음은 취직, 결혼 한편으로는 대학가면서부터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사는 이가 많다. 그래도 겨울이면 꼭 모여서 두 달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 터지도록 연습하고 연주회를 한다. 부산에 있는 선배들도 직장생활하고 결혼 생활하는 와중에 연습에 참여한다. 또 한 기수별로 남성 복4중창의 구조를 가지니까 그 소수의 인원이 모여 합창단을 구성하는 현실은 우리의 특이한 구조이다. 어찌 1주일에 한 두 번 연습하는 다른 모임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겠는가?

시간이 지나고 우리에게 여유라는 조건이 주어질 때까지의 우리와 음악과의 관계는 차라리 전투적이고 자기희생적이라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노래하고 모이는가?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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