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America 그리고 Italy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16년 가까운 세월을 옆에 두고 보듬어온 내 분신을 드디어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나씩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후배들에게 인수인계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학을 떠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금을 모으며 Italy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혼자서는 이태리의 비싼 생활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후배 L군과 함께 떠나기로 약속하고 그의 일정에 맞추어 출국을 하기로 하고 대략 10월중으로 날짜를 잡았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뜻밖에도 그 후배의 이태리 행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혼자만의 불안한 이태리 행을 감행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먼저 독학이 가능하다는 미국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미국에 계시는 안면이 있는 목사님께 연락을 취하고, 한편으로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 효종에게 근황을 알렸다. 모든 가능성을 타진하여 보기로 하였다. 결국 두 가지로 압축된 결과 앞에서 고민했다.

모험과 최저생활의 보장을 두고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내가 처한 상황이 미국 Visa가 나오기 힘든 여건이란 것이었다. 재정보증과 적지 않은 나이 등이 문제가 되어 여러 군데의 유학원에서 포기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그럴 즈음 미국에 부탁한 I-20 Form(입학허가서)가 도착했다.

이태리는 Visa가 쉽게 나오니 우선은 미국 대사관에 접수하여 인터뷰를 하고, 만약 거부당하면 이태리로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어떤 뜻에서인지 미국 Visa가 기적처럼 나온 것이었다.

유학원에서 조차 거의 100% 비자가 거부당할 거라고 했다. 부모님이 재정보증인이 아니고, 통장에 잔고도 거의 없고, 많은 나이의 독신남성은 학생비자를  기대않는 것이 좋다고들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밀어붙여 본 것인데, 떡하니 비자가 나왔다. 인터뷰하던 맘씨 좋게 생긴 미국영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심히 해보라던........


St. Louis란 도시로 행선지가 정해지고 11월에 출국 날짜를 잡고 비행기를 예약했다. 친구 효종을 통해 여러 가지를 부탁해 두고 미국에서의 고행에 대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여러 번 이런 경우가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이 날은 시간이 지낼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었다. 마침 5기 경수 내외가 교통사고로 입원하고 있던 정형외과에 들러서 검진을 받아보니 제5 경추 디스크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 즈음 집안에 좋지 않은 심각한 일이 생겨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집을 떠나 살며 규칙적이지 못했던 생활패턴과 오랜 소파에서의 잠자리 등이 겹쳐져서 목에서 뭉쳐진 듯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물리치료를 받아도 별 차도가 없고 한방을 찾아 침을 맞아도 큰 효과가 없었다. 큰 병원을 가보니 수술을 해도 확실한 보장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모두의 공통되는 점은 돈이 많이 들고 최소한 3개월 이상의 치료기간을 요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출국 날짜가 잡혔기 때문에 지휘하기로 된 한인교회에서 가능하면 빨리 들어오라는 연락이 자꾸 오는데 몸은 차도가 없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여기서 치료를 받게 되면 조금 모아놓은 유학자금이 바닥나 유학 자체가 포기되어야 했다.

우선 1차로 출국을 잠시 연기하고 조금 더 치료를 받아 보았다.

미국에서는 사정이 급한지 들어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 친구 효종 이도 들어오면 척추치료는 한국에서보다 나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차도를 보이지 못하고 있고 점점 더 마음은 급해지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96년 12월 5일로 출국일을 잡았다.

죽어도 가서 죽자는 마음이었다!


대구공항에는 부모님과 사촌동생들이 배웅을 나왔다.

딸을 이태리로 보내고 아들마저 미국으로 떠나보내는 아버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객지생활만 해오던 또 몸마저 아픈 아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던지 어머니는 서울까지 따라오셨다. 김포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데 어머님의 얼굴이 흐리게 시야에 들어왔다.

서울발 Detroit행 Northwest 항공 30번 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밤은 채 1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몸은 아프고, 짐은 많고 말은 통하지 않는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꿈만 같았다.

날짜변경선을 지날 즈음 의식을 묻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비행기는 나를 미국의 자동차로 유명한 도시, 디트로이트의 국제공항에 내려놓았다.

입국수속까지는 무사히 마쳤는데 최종 목적지인 St. Louis까지 가는 미국 국내선이 기상악화로 결항이란 것이다. 말은 안 통하지 짐은 6개나 되지 오랜 고기압 상태의 비행 때문에 왼팔은 목의 영향으로 완전 마비상태가 되었는데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손짓 발짓 다 동원해서 6시간 뒤에 출발하는 다른 비행기를 재 예약하고 그 큰 공항을 배회했다. 그런데 막상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눈보라가 더욱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난 어쩌란 말이냐! 눈보라야! 난 어쩌란 말이냐!


공중전화하기도 힘들어 마중 나올 친구와 연락은 닿지 않고 비행기는 출발할 생각도 않는데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겨우 탑승수속은 시작되어 창가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계속되는 눈보라에 비행기는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만 맞고 있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깜박 정신을 놓았는데 드디어 비행기는 눈보라를 뚫고 하늘을 향해 박차고 올랐다. 비행기 안은 줄어든 비행편수 때문인지 빈자리 하나 없는 만석이었다.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 하나 눈에 띄지 않던 기내를 잠시 돌아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미국생활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사람들의 생김새도 각양각색인 나라. St. Louis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 효종의 집으로 가는 차안에는 줄곧 회색 빛깔 상념이 날리고 있었다.

친구가 베푼 그 동안의 선행이 그 뒤 한 달간의 치료를 무료로 받게 해 주었고, 몸이 서서히 정상을 회복하면서 운전면허 취득, 한인교회에서의 지휘, 어학학교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미국생활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마크 트웨인이 ‘톰소여의 모험’ 을 집필하며 거닐었음직한 미시시피강을 매일 넘나들며 심수봉의 목소리와 Jin Harmony의 합창을 나의 애마(愛馬) - 중고 Mazda의 차창 밖으로 날려 보냈다.


비록 모진 마음먹고 유학을 나왔지만 여건만 주어진다면 해마다 정기연주회 시기만큼은 후배들과 한국에서 보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15회 정기연주회에는 어느 선배가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주기로 했으니 한국에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인교회 성가대를 우리의 초창기를 생각하며 열심히 지휘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알아보니 약속은 부도가 났고 그냥 미국에서 연주회 하는 그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15회 연주회가 있던 날, 차를 몰고 64번 하이웨이로 나갔다. 정신없이 어둠 속을 달리다가 지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갈 때는 은퇴한 미국인 목사님 댁에서 기거하면서 가사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었다. 몸이 안 좋아 힘든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고사하고 우리로 치면 조그만 원룸 아파트를 얻어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된 후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고마운 교포 분들의 도움이 이어져서 어느새 한 살림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시는 것들을 거절 못하다보니 심지어 컵이나 식기들은 50명의 파티도 가능할 정도였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았다. 아니 역설적으로는 내가 살아온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다.

총각이 혼자 사니까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생각들 하셨는지 냉장고에는 날라져 온 고기와 음식들로 언제나 가득했고, 거의 매일 식사 초대가 이어져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몸은 안 좋아 운동은 제대로 못하는데 먹는 것은 잘 먹지 어디를 가나 차로 움직이니 미국 사는 동안 무려 8kg이나 몸무게나 늘었었다.



St. Louis에서는 어학만 하고 음악공부는 New York쪽으로 가서 할 생각이었다. 그 동안  Chicago에는 한 번 가 보았었고, 기회가 닿아 여건도 알아볼 겸 New York으로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를 몰고 갔었는데 미국은 정말 광활한 땅이란 걸 실감하게 되었다. 달리는 시간만 19시간이 걸려 New York에 도착했다. 맨하탄(Manhattan)의 거리를 걸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빌딩의 전망대에서는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곳은 곧 앞으로 맞닥뜨려질 절망을 예고했다.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싼 물가, 엄청난 학비, 내가 알고 있던 아르바이트 급여와는 판이하게 낮은 임금.......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산술적으로는 독학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휘전공의 입시요강이 문제였다.

정말 음악의 다양한 과목을 총망라해서 입시를 본다고 하는데, 그 중 피아노 한과목만 하더라도 체계적 음악수업을 받지 못한 나에게는 ‘불가능’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의 음악공부란 돈 없고 백 없는 내게는 실로 거대한 벽이었다. St. Louis로 돌아오는 걸음은 그래서 무거웠다.

여기서는 음악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어느 한 구석 잘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계신 분들은 나를 너무나 과대평가해 주셔서 곁에 붙잡아 두고들 싶어 하셨다. 그분들은 실제로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시기도 했다. 미국시민권자와 결혼을 해서 영주권을 받을 수도 있었고, 교회를 통한 또 다른 신분유지의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유학을 결심했던 이유가 아니었다.

미국에 살러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와 생각하면 정말 배부른 소리지만, 미국에서는 마음이 떠났다. 막연히 이태리로 갔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고 비록 모험이긴 하지만 그곳에 나에게 맞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이지만 가져온 돈은 바닥이 났고, 교회에서의 활동으로 겨우 생활을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회의 땅은 나에게 한숨을 짓게 했다.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만 나타나는가!

이때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행운은 찾아왔다.

미국생활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셨던 교포 한 분이 나의 사정을 이해하시고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음악을 좋아하시는 그 분은 한 젊은이의 꿈을 위해 투자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코 부자가 아니셨다. 그것은 유학경비의 전부가 아닌 이태리로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었지만, 미국에 눌러 앉을 뻔 했던 나는 그래서 이태리로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말 행운이었다.

아니,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후에는 서서히 미국생활을 정리해 나갔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그곳의 고마운 분들과의 아쉬운 만남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말 희비가 엇갈리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만 얘기하자면,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서 한인교회 성가대를 열심히 하던 ‘히라따’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분과는 볼링, 당구, 탁구 등을 치면서 자주 어울리며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내가 미국을 떠난다고 하자 그분은 학비 때문에 가는 거라면  자기가 도와 줄테니 더 있으라고 붙잡았다. 빙그레 웃으며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하자, 한 학기만이라도 더 있으라며 애원(?)했다.


어디 그 분 뿐이랴! 고단하게 살아온 딱딱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녹여주던 많은 고마운 사람들의 면면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떠나오며 그분들에게 Jin Harmony의 녹음 테입을 선물하고 왔었다. 만약 어느 먼 미래에 Jin Harmony가 미국에 공연을 가게 된다면 아마도 그분들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분들은 기다린다 하셨다.

어쩌면 그분들은 내가 아닌 내가 형상화시킨 Jin Harmony를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7개월 남짓한 미국생활은 마치 7년을 산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박찬호가 활동하고 있었고 한국교포가 가장 많이 산다는 Los Angeles, 금문교와 전차, 구릉지대로 유명한 San Francisco, 도박과 환락의 도시 Las Vegas 등 서부 쪽을 1주일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그리고 LA발 서울행 KAL기는 태평양을 향해  날아올랐다.                   



다시 돌아온 한국.

Jin Harmony는 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무척 아파한 시간이었다.

무엇을 하였는가?

또 앞으로는?

 

이제는 Italy로 간다!

오라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간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고생이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도박을 하는 절박한 심정이다.

실패와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가야한다.

왜? 

멀리 있는 미래의 Jin Harmony가 보이고, 또 이루고 싶은 꿈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 있을 듯하다! 그러나 아픔이 커져만 간다.

훗날 모두 얘기할 수 있으리라!

지금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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