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노래가 있기에



선배들의 떠나간 자리는 너무도 가혹했다.

Jin Harmony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혼자라는 외로움이 골수에 스며들었다. 후배들을 가족으로, 또 동생으로 여기며 헤쳐 온 세월이었다. 남들에게는 욕을 먹고 남들에게는 손가락질 당해도 그들이 있기에 난 꿈을 꾸며 하나씩 징검다리를 디뎌왔다.

번듯한 직장자리를 포기하고 10회 연주회를 택한 것도, 서른에 괜찮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음악의 길로 들어선 것도, 늦은 나이와 얄팍한 주머니에도 유학을 감행한 것도, 앞날이 훤히 보여도 귀국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Jin Harmony가 있고 함께 그리며 꿈꾸는 우리들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후배들, 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내게 있어 가족이요, 미래요, 종족보존의 산물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기적이었다면 몇 번씩이나 내 길을 갈 기회를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왜 믿지 못하는지, 왜 의심하는지, 왜 나를 버리는지 하늘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해결해 볼 요량으로 찾아갔던 사람들에게서 더 큰 아픔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음을 알았다. 속 좁게도 일련의 사태를 배신으로 받아들인 나는 극도의 분노에 몸서리를 치다가 결국 자포자기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해 가을은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철저히 혼자였다.


어둠의 몇 달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은 노래하던 계절, 그 누적된 반복의 힘은 예상외로 무척 강했다.

연주회를 거를 수 없다는, 다시 무대에 서야한다는 사명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남은 이들은 몇 명의 대학생과 재학생들뿐인데 연습실 운영은 어떻게 하며, 연주회는 또 어떻게 치러낸단 말인가!

궁하면 통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방안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동문합창단이란 고유의 색깔과는 맞지 않지만, 그때의 내게 다른 선택의 폭은 없는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실패의 경험도 있었지만, 여자를 단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했다. 그냥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색깔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고안해 낸 것이다.

이미 각 대학에서 동문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하는 부산진여고에 우리와 같은 중창단을 만들어 키워내는 것이었다.


남은 대학생 몇과 상의를 하고, 아직 어리지만 재학생의 제일 선배인 16기들을 불러 현 상황과 계획을 설명했다. 남은 자들의 합의로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부산진여고 여학생들은 예상외로 어려운 여건이지만 많은 수가 동참해 주었다. 이 역시 미봉책이라 머지않은 장래에 그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게 되지만 최소한 그 당시에는 새로운 활력소로서 작용하여 Jin Harmony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활동은 그 후 2년 남짓한 동안 참 많은 도움과 힘이 되어주었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그들을 이용하려 한 것은 결단코 아니란 것이다. 불가피하게 진로가 수정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녀들이 우리의 처음과 같은 시기를 잘 견뎌낸다면 더 큰 하나를 이루어 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선발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그녀들의 노래실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연습량과 비례하지 못하는 합창실력은 나를 한숨짓게 했지만 분위기만큼은 이전 어느 때보다 밝아져 있었다.

남녀의 조화란 참 묘한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도 사람들을 웃을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연주회에서 만큼은 선을 분명히 해야 했다. 보다 많은 참여는 훗날을 기약하고 한 Stage만 혼성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주 짧은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겨울, 어린 그녀들이 보여준 열정만큼은 대다한 것이었다. 그 좁은 지하 예원에서 연습하는데 너무도 열심이었고, 심지어 공기가 부족하여 현기증마저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연주회 날, 다녀가신 진여고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학생들이 초대권을 주기에 아무 생각 없이 왔었는데, 너무 멋진 연주회를 보게 되어 제자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우리 학생들이 오늘처럼 진지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런 활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좋은 무대였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공부하는데도 좀 더 할애했으면 좋겠다.^^!”


선배들을 향한 기다림은 결국 허무로 다가왔지만, 이별의 아픔은 파도를 타고 넘어 결국 음악으로 귀결되었다.


1999년 2월 20일, 명맥이 끊어질 뻔 했던 정기연주회의 맥이 다시 이어졌다. 

문화회관 중강당을 가득 메워준 관중들이 감사하고, 함께 해준 이들이 너무도 소중하다.

부족하고 어린 단원들을 데리고 최대의 효과를 내기위해 부단히 노력한 연주회였다. C.C.M.으로 젊은층의 분위기를 맞추고, 트로트를 편곡하여 관중의 공감을 유도하며, 현악4중주 반주로 가요를 부르기도 하는 등 편성의 묘를 최대한 활용하여 아쉬운 곳을 메웠다.


물론 그동안 여러 해 함께 한 반주자가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고, 무엇보다 허전하고 안타까웠던 것은 ‘Final Stage'의 빈자리였다. 매번 Jin Harmony의 연주회를 더욱 Jin Harmony답게 해주었던 것은 졸업생 모두가 함께 무대에 올라 추억의 노래를 열창하던 무대가 아니었던가!

단 2명의 선배만이 찾아와 객석에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깊은 한숨이 터졌다!

이렇게 역사의 또 한 페이지는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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