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돌아보니 그대는 없더이다.
3월에 연습실과 내 거처가 이사를 했다.
거제리의 지하 연습실은 더 이상 양적(?)으로 늘어난 인원을 수용하기에 좁았고, 마침 계약기한도 되었기에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했다. 비슷한 조건에 더 넓은 곳을 찾는 것이 힘들 것 같았는데 예상외로 쉽게 발견되었다. 16기 J군이 집 근처에 적당한 곳을 보았다고 해서 찾아가 봤더니 조건은 비슷한데 공간이 훨씬 넓었다. 물론 지하이긴 했지만.......
Jin Harmony가 생긴 이래 처음 만들어졌던 거제리의 연습실 ‘예원’은 파란만장했던 7년간의 생을 마감했다.
옮겨간 곳은 초읍의 ‘삼광사’라는 큰 사찰 밑이었다.
삼광사는 일개 사찰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와 신도수가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내게 삼광사의 영향권 아래 있는 연습실 부근의 불교적 분위기가 무척 낯설었지만 새로운 둥지에서의 생활은 자리를 잡아갔다.
98년 말, 여학생을 받아들이면서 변한 것 중에 하나가 나에 대한 호칭이었다. 그동안은 나이차에 상관없이 형으로 통일하였었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외부인사들도 호칭에 대한 조언을 했다. 선배들 사태도 그랬지만, 합창단으로서의 조직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호칭을 써야한다는 것이었고, 그동안 어느 정도 필요성을 느끼고도 있었기에 ‘형’에서 ‘선생님’ 혹은 ‘지휘자님’으로 부르게 하였다.
17기로 들어온 P군의 경우가 그 필요성에 대한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는데, P군은 3기 H군의 처조카였다. 모두가 모였을 때 그 P는 1기인 나에게는 ‘형’, 3기인 H군에게는 ‘고모부님’이라고 부르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나이차가 20년 가까운데 계속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처음엔 친밀감과 동질감을 위해서 나이차는 상관이 없었는데, 차츰 부담스럽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공석에서는 ‘선생님’, 사석에서는 10년차 미만은 ‘형’ 10년차 이상은 ‘선배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예원을 옮기고 처음 한 것이 19기 단원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16회 정기연주회의 반주자 중 한 명이었던 했던 L양의 부친께서 모교의 교감으로 계셨기에 재학생들 관리는 어느 때보다 용이한 시절이었는데, 문제는 찾아온 학생들의 음악적 수준이었다.
고르고 골라 선발한 - 물론, 인원수를 채우기 위한 상대적 평가였다 - 10여명의 신입생들은 그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다. 아주 쉬운 곡 4마디를 2시간 연습에도 불구하고 제창(齊唱, Unison)이 되질 않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혔지만 어찌하랴, 주어진 숙제인 것을.......!
다음 편에 상세히 기술되겠지만 이 19기들이 다음 해에 크나 큰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 이단아(異端兒)들이었다.
이때부터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창, 청음훈련이 시작되었다. 나의 강압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부족한 이들의 실력을 무대에 세울 정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책이기도 했다. 아무튼 매주 이어진 시험을 통한 강훈련은 이들을 만족할 순 없어도 적정수준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여학생 동기가 생긴 16기 아래의 단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남녀가 모이면 불꽃은 튀게 마련이지만, ‘성혼(成婚)을 위한 금연(禁戀)’을 강조하며 조심시켰지만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여고생과 대학생의 로맨스, 여대생을 사이에 둔 3각관계, 차마 말 못하는 외사랑, 심야의 용형호제 사건 등 등 내가 아는 것만도 여러 가지 스토리가 있으니 몰랐던 것까지 합치면 아마 꽤 많은 연애담(戀愛談)이 있었을 것이다. 밝힐 순 없지만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여기에도 부익부, 빈익빈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결합의 최대 수혜자(?)는 얼마 전 결혼한 15기 M군과 16기 K양일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이 실험(?)이 실패로 끝난 후에 느낀 것이지만, 이들에게 예원은 청소년기의 놀이터였다. 물론 예외로 음악에 열정을 보이고 왕성한 활동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교 졸업과 동시에 떠나간 것을 보면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기간은 차라리 길지 않았던 것이 서로를 위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다 먼 미래에 제대로 된 합창단을 꿈꾸었던 나와 고교시절의 돌파구로서 예원을 찾았던 이들은 시작부터 이별이 예고되었던 모양이다. 여자단원이 모두 활동을 그만둔 지금도 16기 아래의 단원들은 기수별로 남녀 간 동기(同期)모임을 지속하고 있다고 하니 내 짝사랑은 또 한 번 상대를 잘못 골랐던 것이 분명한 모양이다.
그들을 탓할 생각도 없고,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있을 때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의 수고와 노력이 무너져가던 Jin Harmony의 마지막 생명력을 3년간 더 연장해 주었으니 차라리 감사해야 하리라!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Jin Harmony에 여자가 들어간 자체가 잘못 된 것이다! 차라리 연주회를 쉬던지, 문을 닫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닌가! 그렇게까지 해서 이어가야 하는가!”
내 생각은 다르다.
예를 들어서, 장성한 자식이 몹쓸 병에 걸려 치료할 방법이 없다면 부모는 어떻게 할까? 아마 자식을 죽어가게 그냥 둘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자식을 살리려 노력할 것이다.
그때 민간요법을 통해 같은 병이 나았다는 말을 들었다면 부모는 어떻게 할까?
‘고통 없이 그냥 가게 산소호흡기 떼라, 그냥 보내주는 것이 자식을 위하는 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제3자 이거나 부모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며, 죽어가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약한 사람임에 분명할 것이다.
1999년은 그런 씨름으로 한 해가 갔다. 새로운 합창단의 초석을 다지고, 이 단체가 제대로 성장해 가는 밑그림을 열심히 그려갔다.
그 해 가을, 또 한 명의 여인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멀어져갔다.
결혼 일보직전까지 다가갔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놓아 보냈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고 위해주었던 사람이었다. 아울러 내가 갖추지 못한 현실적인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던 그녀였다. 하지만, 여자에게 기댄 삶을 받아들이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하는 삶이 고통일지라도 감내하겠다던 그녀였건만, 내 욕심을 위해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정을 가지면 그에 따른 책임도 다해야 하는 법!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고, 무책임한 가장이 되기는 더욱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Jin Harmony를 위해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으며, Jin Harmony를 등한시 하고 그녀를 위하기에는 이미 마음에 빈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만큼 그녀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도 난 어른들의 동화(童話)를 꿈꾸며 살았고, 현실에 맞춘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믿었기에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운명의 그녀’는 아니었지만, 현실의 내게는 너무도 필요했던 그녀! 이런 고민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아직 배가 불렀구먼!”
그녀를 마지막 보내면서 했던 말,
“아마 당신이 돌아서는 순간부터 나는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후회를 한다!
그러나.............................................................................................
그녀와의 이별이 아물어질 무렵, 밖의 날씨는 추워져 있었다.
이제는 겨울병을 치료할 시간!
Jin Harmony에 난 상처도 내 마음에 난 상흔도 치료법은 하나였다.
우선 세상이 온통 떠드는 밀레니엄(Millenium)의 분위기를 이어받아 작은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가졌다. 이미 수년째 여름에 가족음악회를 가져오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공연은 꼭 해보고 싶었던 공연이었다. 그렇게 워밍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정기연주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질적인 부분은 예전에 모자랐지만, 양적인 부분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인원이었다. 매달 정기모임 때면 70, 80명이 모였고, 여름에 MT를 갈 때면 대형버스 1대로는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우선 욕심을 부렸다. 장소를 다시 문화회관 대강당으로 상향조정했고, 처음으로 연주복을 남녀 모두 맞춰 입기로 했다.
음악적으로는 새로운 모험적인 시도를 했다. 바로 MBC 악단에 몸담고 있던 후배, 양우석의 협조를 받아 MBC 4인조 밴드의 반주를 도입하기로 했다. 또 바이올린, 수화(手話), Rap, 안개효과 등 다양한 시도를 무대에 올리는 기획을 했다. 젊어진 단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보다 즐기며 부를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연주회가 될 수 있도록 부족한 나름의 최선을 경주했다.
드디어 2000년 2월 26일 다시 문화회관 대강당으로 장소를 옮긴 Jin Harmony의 열여덟 번 째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에 MBC악단의 악기 세팅을 하는데 무대담당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했다.
“오늘 합창단 연주회 아닙니까?”
“합창단 연주회 맞습니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은 아마 우리가 처음일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걸 좀 좋아해서요! ^^”
이번 연주회 역시, 여성단원은 세 번째 무대만 혼성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첫 무대는 무난하게 한국가곡으로 시작했다.
두 번째 무대는 Canzone, Musical, 한국가요로 옮아가며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바이올린 반주에 폭이 넓어지고, 안개효과가 깔린 무대는 서서히 달아올라갔다. 이어 마지막 곡은 드라마 'KAIST'의 주제가를 MBC 밴드와 여성단원들의 수화(手話)를 곁들여 열창했는데, 중간 휴식시간 전에 분위기는 이미 고조되어 갔다.
세 번째 무대는 몇 년간 계속해 온 C.C.M.이 무대에 올려졌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주(MBC 밴드), 색깔 조명, 특수효과와 무선 마이크까지 동원된 버라이어티(Variety)한 무대가 펼쳐졌다. 중간에 Rap으로 부르는 곡도 선보이는 등 꽤나 젊은 층의 호응이 있었던 무대였다. 좀 의아해 한 관중도 있었겠지만 관람후기를 통해서도 ‘신선한 충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Final Stage'.
앞 선 무대의 화려함과 생기발랄함도 살짝 빛을 잃는다.
아마도 선배들의 빈자리 때문일 것이다.
새롭게 얼굴을 보인 선배가 몇 명 함께 하긴 했지만, 문제의 그 멤버는 아니었다. 이번 연주회는 단원들이 연주복을 입고 있었기에 하얀 연주복 사이로 검게 박힌 4명의 선배모습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몹시도 서글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창한 추억의 그 노래들은 우리가 하나임을, 우리는 노래로 하나 될 수 있음을 공허히 하늘로 날렸다.
그것은 멀리 있는 그대를 향한 안타까운 외침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