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라는 모든 것을 신(神)에게 구했으나 오히려 그 반대급부로 인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는 시(詩)구절이 생각난다. 언제 한 번 남보란 듯이 살아 본 기억은 없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주어졌던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사랑스럽고 또 애착이 간다.

돌이켜 살아온 날, 나태와 안일함이 지배적이었음을 시인하면서 한 부분이나마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차라리 몸부림이었다고 기억하고픈 나날들......

이제 나를 알고 'Jin Harmony'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짧지만 긴 이별을 앞에 두고 또 큰 흐름의 한 부분이나마 매듭짓고 싶은 마음에 짧은 필력(筆力)이나마 글을 쓸 용기를 내었다.


누구나 소싯적에 1등 한 번 안해 본 이가 없고 남 앞에서 노래자랑 한 번 안해 본 사람이 없듯이 나의 어린 시절 역시 꽤나 끼를 발산한 듯하다. 초등학교시절 멋모르고 불러 대던 『눈물 젖은 두만강』, 중학교 때 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던 『봄처녀』......

이젠 아련하게만 느껴지지만 그 때가 좋았던 듯하다.

그 시절, 남들이 Guitar치는 모습만 보면 그렇게 좋아 보였고, 피아노 치는 단발머리 여고생의 뒷모습만 보아도 이유 없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졌었다. 애석하게도 그럴 수 없는 처지가 싸하니 마음에 한(恨)으로 쌓여 갔다. 그 아픔이 한편으로 더욱 음악에 집착하게 했으며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는 지금의 자기 존재로 이어졌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기타를 가지지 못했으니 빌려서라도 배우려 노력했고, 없는 피아노 탓하기보다는 교회당이나 학교 음악실에서 단음(短音)이나마 손에 익히려 애썼었다. 비록 음감(音感)이 부족하고 능력은 미약하지만 그런 여건에서 파생되는 오기와 집착이 더욱 음악을 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Jin Harmony'를 만들고 오늘까지 꾸려오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풍요로움을 누렸었고 순조로운 항해를 했더라면 아마 그 때의 용기와 무모함은 없었을 것이고 아울러 'Jin Harmony' 역시 평범한 고교 시절의 추억으로 자리매김된 과거의 한 단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문(愚問)일 수밖에 없다. 짧으나마 내가 살아온 날 -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노래를 좋아하기에 구상할 수 있었고, 그 구상의 실체를 통해 더욱 음악을 사랑하게 된 'Jin Harmony' - 그 이름 자체의 명명(命名)이 그랬듯이 모진 풍파를 온 가슴으로 헤치고 나와 이제껏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내 젊은 날의 온갖 것을 모두 쏟아 부은, 소중한 나의 분신 「Jin Harmony」 

이제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靈感)으로 이루어진다고 한 에디슨의 말처럼 음악 역시 연습과 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선천적인 재능이 없으면 발전을 기할 수 없는 조금은 폭이 좁은 분야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음악계에 종사하는 가족이 몇 분 계시는 것으로 보아 엷으나마 음악적 피는 물려받은 듯하다.

어릴 때는 대구에서 대가족이 같이 모여 살았다. 당시에 아주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중국 영화, 「스잔나」가 대단한 인기였는데 그 주제가를 담은 작은 도넛 LP가 상당히 많이 팔렸다 한다. 엉덩이를 흔들며 그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내 모습이 귀여웠던지 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나를 가운데 세워 기를 살려주셨다 한다. 한 번은 짓궂은 삼촌 한 분이 막걸리를 먹이고는 노래를 시켰다고 하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술 취한 어린애의 모습이 정말 볼 만 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는 오락시간이거나 소풍을 가게 되면 늘상 앞에 서야 하는 단골손님이었는데 그 때 꼭 불러야 했던 노래가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음악이 무엇인지, 노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노래하면 다들 좋아하고 박수 쳐주니까 그냥 신명나게 불렀었다.


중학생이 되니까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학교 대표로 독창대회에 나가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 때 지정곡이 「봄처녀」였는데, 어머니 코치 받아 가며 정말 열심히 연습했었다. 그러나 학교 대표로 선발되고 대회준비를 하던 중에 변성기가 찾아왔다. 대회는 포기되었고 빨리 변성기가 지나가기만 바랬었다. 그 때가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는데 결국 중 3때 다시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가서 은상을 받았었다.


그 즈음 나에게는 중대한 결정이 그 무게를 더해 가고 있었다. 성적이 전교에서 제법 상위권이었는데, 집안사정으로 당시에는 전액 국비로 인생을 보장해 준다던 「금오공고」를 강요받고 있었다. 전국 등위 5% 이내여야만 지원이 가능하며 박정희 前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 아래 성장하던 그 학교는 어쩌면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 학교에 지원하라시던, 예상되었던 아버님의 강요와 담임선생님의 권유, 그러나 웬일인지 그 학교에는 죽어도 가기가 싫었었다. 도저히 아버님의 뜻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없노라고 말씀드리는 목소리는 떨렸고, 그 말을 들으시던 아버님의 가슴은 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결국 내 뜻대로 인문계 고교 진학이 결정되고 일류 대학에의 꿈을 키웠다.


그 해 예비고사 전국 수석은 「오관석」이라는 부산진고등학교 학생이었다.

그리고 부산진고등학교 합창단은 당시 강수범 선생님의 지휘 아래 6년동안 부산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머리 좋다는 소리, 노래 잘한다는 얘기를 남들만큼은 들어온 내가 과연 어느 학교에 마음이 쏠렸는지는 분명하리라! 나 개인적인 측면이 아니라도 학군의 범위가 넓었고 학교 수가 지금에 비해 적었던 그 시절의 부산진고등학교는 부산 최고의 명문고교임에 분명했다. 이제 부산진고에 배정 받는 것은 최고(最高), 최대(最大)의 지상과제였다. 내 두 가지 욕구가 충족 될 수 있는 곳 - 부산진고등학교는 바라던 이상의 학교였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온 나는 매일 밤 간절한 기도를 드렸었다.


‘주님! 이 작은 소망을 져 버리지 마세요!’


연합고사가 끝이 나고 학교배정을 하던 날 - 하늘은 맑게 개였었다. 한 학급당 인문계 고교로 진학하는 40명 정도의 인원 중에 부산진고는 3명만이 배정 받을 수 있었다.   


“3학년 2반 63번 강성일 - 부산진고!”


또렷이 내 귀에 들려온 소리였다. 작은 기쁨, 그리고 운명의 소용돌이와 맞닥뜨려지는 나의 학창시절은 시작되었다.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