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음악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에서부터 넓게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에 이르기까지 쉼 없고 다양하다.

11회 연주회가 끝나고부터 나에게는 스스로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선택의 순간이 심각하게 다가섰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의 주체는 ‘나’ 인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는 것이 결론이었다.


Jin Harmony와 이루고 싶은 꿈 - 그것들이 제 모습을 찾게 하려면 당연한 선택은 음악공부를 다시 해서 스스로 자격을 갖추는 것이었다.

우선 아마추어로 아무리 치적을 쌓아도 제도권 음악 앞에서는 ‘의미 없음’ 이 되고 만다. 그런 서러움이 오기도 키우게 했지만 체계 있게 음악을 공부해야 할 필요도 강하게 느꼈었다.

이제는 어떤 방식이냐는 방법론만이 남았다. 유학, 음악대학 입시준비, 편입학 등이 실질적 방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지금의 은사(恩師)님을 만나 뵙게 되는 기회가 찾아온다.


5기 주영 이가 제대하고 복학절차를 알아본다기에 같이 동아대 대신동 캠퍼스에 들렸었다. 음악과 건물을 지나다가 이왕 왔으니 입학이나 편입절차를 알아 볼 요량으로 사무실로 가서 작곡과 교수님을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잠시 기다렸다.

조금 후 만나 뵌 분은 온화한 인상에 무척 친절하신 분이었다. 질문을 많이 드렸는데 하나씩 차분히 답변해 주시고 음료수까지 대접해 주시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아직까지도 이런 교수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나의 첫 질문은 입시비리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편입학에 뒷돈이 들어간다면 솔직히 말해 달라고, 만약 그렇다면 미련 없이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겠다고 했다. 잔잔히 웃으시며 그런 일은 옛말이라 하셨다. 계속해서 작곡전공의 입시요강에 관한 상세한 말씀과 공부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해 주셨다. 대략 윤곽을 파악하고 일어서려는데, 교수님께서 추가로 다른 방법 하나를 일러 주셨다.

과거의 전공이 철학이었으니 음악학을 공부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음악만 해오다 대학 와서 음악학으로 전공을 돌린 학생보다 음악에 문외한이 아니니 공부한 철학에 음악을 입혀 가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느냐 시며 음악학 대학원 입학과 학부편입의 길을 제시하시고 만약 내가 입시를 치르겠다고 마음을 정하면 빠른 길을 모색해 보자고 하셨다.

긴 얘기를 마치고 교수님께는 처음 접하는 분야이니 만큼 깊이 고민해보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한편, 93년 봄이 되고 두 번의 문화회관 대강당 공연으로 생긴 얼마간의 여유자금과 선배들이 조금 더한 기금을 합해서 드디어 우리들의 공간을 꾸몄다. 지하 10평의 규모에 그 이름을 ‘예술의 동산’ - <예원(藝苑)> 이라 정한 후에 하나씩 살림살이들을 장만해 갔다. 가능하면 얻어오고, 그것이 용이하지 않으면 중고제품을 구입하고 만약 중고도 없다면 그때 새것을 장만했다.

협찬받은 피아노가 들어오고 오디오, 텔레비전, 소파, 접의자, 부엌용품, 커튼 등이 속속 접수되었다. 벽이 스티로폼으로 둘러지고 방음을 위해 벽면에 하나 씩 구멍을 뚫어 갔다. 후배들과 난 온 머리에 흰 눈을 맞으며 즐거워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우리들만의 공간을 우리들만의 힘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 후부터 우리는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 듯 모임에 따스함을 더해갔다.


예원이 마련되는 시기를 즈음해서 Jin Harmony사(史)에 또 한 획을 긋는 일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의 인적 구성상 재학생과 군에 갔다 오고 난 후의 선배보다는 군에 가기 전의 대학생층이 실질적인 ‘단체의 발’ 노릇을 한다. 그 동안은 모일 장소도 없었고 행사도 연주회 외에는 별반 없었기 때문에 그 때 그 때마다 잠깐씩 모여도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양한 행사를 치러야하고 한 명에게 치중되었던 편향성을 그들로 하여금 분담하게 하고 사명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도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Jin Harmony 내의 이른바 ‘혼성써클’ 이었다.

한 두명씩 여대생들이 가입하여 5명이 되었고 주로 10기 동기들이었다.


여성의 손길은 예원을 무척 부드럽게 하였고 모임의 성질도 화기애애하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우리는 8기에서 10기까지 이들과 같이 활동했는데 이 팀이 예전부터 구상해 오던 여름 가족음악회의 효시를 연다.

여대생 5명은 Jin Harmony를 위해 참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남자들만이 수직적으로 생활해 온 우리의 특성과 여학생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 간에는 분명 좁힐 수 없는 괴리가 존재했다.

12회 연주회 때 혼성중창을 같이하고 94년에 해체하였는데, 우선 구조적 모순을 발견하지 못하고 시작하려 한 예견된 결말이었고,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 좋지 못한 해결이었으며, 각자가 결혼하여 계수씨들이 들어 올 때까지는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코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와 시기적, 구조적으로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그녀들에게 미안하고, 그 시기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법한 아우들에게도 그러하나 자명한 것은 그 시작과 끝이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동아대 음악학과에 음악학으로 편입할 뜻을 굳히고 그 때의 그 교수님 - 조선우 박사님 - 을 찾아뵈었다. 책도 한 권 선물 받고 입시요강과 요령, 또 참고서적들을 소개받고 준비를 시작하려 하였다. 이 때 운명은 다시 한 번 나를 시험해 보려고 더 달콤하고 거절하기 힘든 유혹을 해 온다. 이 때 나이가 29세, 기업체에 공채가 가능한 마지막 한계점이었다.

교수님과의 만남이 있은 지 일주일이 경과한 날 긴급한 연락이 왔다. 삼성증권에 자리가 있으니 취직하라는 마지막 권고였다. 스스로 다른 가능성을 모두 접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어 얻은 결론 - 음악! 그리고 이를 비웃듯 한 쪽에서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 -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들어가기 힘든 대기업이고, 증권이면 처우도 좋다. 이번에도 거부하면 너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일주일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며 두 가지 속마음은 각각의 목청을 높이며 처절히 대립하였다. 서서히 정리가 되기 시작하면서 가정해 본 것이 10년 뒤의 자화상이었다. 대기업의 중견사원이 되는 것은 큰 실수 없이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반면 음악을 전공한다면 아마추어 시절의 순수한 꿈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며, 그 치열한 음악계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원하는 일은 하고 살 것이고 사람답게 살았다는 느낌만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결론은 정해졌다.

음악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최고(最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다. 또한 편입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은 대학원에서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이 거의 막혀있기 때문이고, 음악학을 택한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독학이 가능한 음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계절은 다시 겨울로 바뀌었다.

12회 정기연주회는 94년 2월 19일로, 대학입시 날짜는 연주회 하루 앞날인 94년 2월 18일로 결정되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복이 없단 말인가!

이제 연주회 장소는 당연히 문화회관 대강당으로 인식되어 있으니 선곡이나 연습수준도 이에 걸맞게 이루어져야 했고 모자라는 실력에 10곡은 편곡까지 담당해야 했다. 예상되는 예산이 거의 1,000만원이니 스폰서도 구해야 했고 모든 인쇄물도 하나에서 열까지 내 손길이 가야했으며, 말할 나위 없이 매일의 연습도 성격대로 정열적으로 진행시켜야 했다.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여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오면 보통 밤 10시가 넘어선다. 이  때부터 책을 잡고 몇 자 보다 보면 어느 새 눈은 감겨가고 있었다. 기억하건대 그 겨우내 내 손으로 직접 불을 끄고 잔 적이 없는 듯하다.


그 겨울은 참으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세 번째의 문화회관 연주회가 성공하면 규모나 내용 면에서 자리를 잡을 것이니 조금도 소홀할 수 없었고, 불합격도 용납될 수 없었다.

드디어 연주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선 날, 불안한 마음에 2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마지막 점검을 한 후에 시험을 치르러 갔다. 대략 4시간 정도의 시간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밖으로 나왔다.

시험을 잘 본 것으로 생각해서인지 무척 상쾌했다.

이제 발표만이 남았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내일의 연주회가 서서히 압박해 왔다.


어김없이 막은 올랐고,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무대에서 흑인영가를 테마로 했던 연주회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으며, 전 단원이 무대에 오른 Final Stage에는 전에 없던 보람이 느껴졌다. 앵콜곡을 관중들이 모두 따라 부를 때, 이제는 그들 앞에 바로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관중을 향해 돌아서서 팔을 저었다.

이제는 안하면 큰 일 날 것 같은 뷔페 피로연을 마치고 다시 그 장소 부곡 하와이로 MT를 떠나기로 되어 있던 날 - 그 날은 편입시험 발표 날이었다.

후배들은 먼저 떠났고 3기 강홍재를 비롯한 11기 몇 명과 확인을 하고 가려고 동아대로 갔다. 확신은 있었지만 막상 발표할 시간이 다가오자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합격이었다! 

곧바로 부곡으로 쫓아가서는 한참을 불합격했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그 날 그 분위기에 먹던 라면 갖다 버렸던 아그들한테 맞아 죽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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