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요나1)의 방황

 

군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힘들게 고생하며 보고 싶은 이들을  날마다 그리워하며 지내다 막상 휴가를 나와 보면 세상은 너무도 야속하게 잘만 흘러가고 있다.

마치 내가 그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말이 온 몸으로 이해가 간다.

세상사 치이고 자기 생활들에 충실하다보면 떠난 사람을 온전히 생각해 주기는 힘들 것이라 이해는 하지만 일정 부분 야속함도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그렇게 참여하고 싶었던 15회 정기연주회 자료들도, 그렇게 보내달라고 연락을 해도 보내주지 않던 주소록이 담긴 수첩도 한국에 와서야 받을 수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혹자는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부럽다!’는 한가지와 ‘어렵다 어렵다 하더니 돈 많이 드는 미국에 가는 걸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보다’는 수군거림이었다. 하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어느 한 편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나 개인은 능력 없고 보잘 것 없지만, Jin Harmony를 책임지고 나가는 제일 선배로서의 또 다른 나는 미련하고 무모할 정도로 강해져야 하니 말이다.

형편이 좋아서,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Jin Harmony의 또 다른 미래를 위한 모험임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오!

‘맨 땅에 헤딩!’이라고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땅이 싫어 미국에 살러 간 것이 아니요, 다른 삶과 타협하러 간 것도 아니었기에 길이 아님을 알았을 때 미련 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하긴 이 방랑이 또다시 반복되리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부산에는 집도 절도 없기에 지하 예원의 소파가 다시 나의 침실이 되었다.

다시 맡는 Jin Harmony의 내음이 그리도 정겨울 수가 없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은 가보고 싶은 나라, 특히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려보았을 나라 - 이탈리아!

늦은 나이에 음악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게 맞는, 그리고 현실을 수반할 수 있는 음악적 방법론은 이태리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미국은 정규대학에 들어가야만 배움도 학위도 있을 수 있지만, 이태리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필요한 부분을 배우고 Diploma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국관광객이 넘쳐나는 그곳에서 가이드를 하면 독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금도 모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집 한 채 장만해서 들어온 경우도 있다고 했다. 입과 귀가 터일 때까지만 버텨내면, 그리고 몇 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고생하면 꿈과 현실을 더불어 살찌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과정에 차마 다 내뱉지 못한 아픈 사연 - 내가 떠난 Jin Harmony를 위해서 무언가 도움이 되고자 기획했던 연주회가 어느 후배의 오해로 풍비박산이 난 사건 - 을 마음에 묻은 채 이태리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이탈리아는 비자 수속을 위해서 입금 완료된 입학허가서와 보험증, 항공권 등을 요구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생 편에 Perugia 언어학교에 학비를 보내고 입학허가서를 받고, 1997년 12월 28일을 출국 일로 잡고 대한항공을 예약했다.

그 당시는 서류만 제대로 갖추어지면 지금보다는 이탈리아 비자 받기가 쉬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부산외국어대학의 일반인을 위한 이태리어 야간 강좌를 3개월간 수강하면서 이것저것 준비를 해갔다.


때는 1997년 11월 - 그리운 부산, 그곳에서 출국일까지의 아쉬운 나날을 보내는 즈음 이상한 기류가 한국 경제 전반에 걸쳐 감지되기 시작했다. 외환시장이 경색되면서 환율이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드디어 이태리행 Visa가 나오던 12월 19일, 나는 하루 전 야간 심야고속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한남동에 있는 이태리 대사관에서 Visa를 찾아서 압구정동에 있었던 13기 명진이 자취방에서 부산에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TV에서 가슴 무너지는 News가 방송되고 있었다.

정부에서 그 동안 자체수습 노력을 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감춰두고 치유하지 못한 대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국치(國恥)의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국가신임도는 땅에 떨어지고 국가부도설까지 나돌았다. 급기야 환율이 $1.00당 ₩2,000에 이르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심정으로 이태리 행을 고집하면서 그동안 연락을 미루어왔던 미국에 계신 분들에게 이제 이태리로 간다는 전갈을 오래간만에 전하게 되었다. 임동식 집사님이라고 미국에 있을 때 특히 친분이 두터웠던 분이 계셨는데 - 그분은 하시던 일을 정리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신학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목회자로 계신다 - 그분과의 국제통화중에 이태리행이 어렵게 되면 다시 미국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는, 만약 생각이 있다면 당신께서 할 수 있는 한 돕겠다는 언질을 주셨다.  


하루하루가 거듭될수록 고민은 쌓여만 가고 갈등은 깊어만 갔다. 연말이 다가오고 출국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결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연주회 준비를 하는 후배들의 직접 말 못할 고충 또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우선은 모험을 해서라도 이태리로 가느냐, 아니면 닥쳐온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시간은 점점 압박해 오고 마음은 시나브로 평정을 잃어 가는데, 대세는 이미 기울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현실의 장벽은 나의 꿈을 보다 먼 곳으로 옮겨 놓고야 말았다.

한 발짝 더 다가가기 힘든 곳으로...


일단 이태리 행은 포기가 아닌 다음 시기로의 유보라고 위로하면서 일단은 현실적인 가능성, 그래도 혼자 힘으로 버텨낼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미국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예의 그분에게 부탁해서 San Jose Christian College의 종교음악과정에 조건부입학을 위한 입학허가서를 부탁해서 또다시 미국으로의 여로(旅路)를 준비했다.

뽑아든 칼로 썩은 무라도 자르는 심정이었을까!


처음 미국비자 받기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IMF 사태’ 하인 그때는 나와 같은 조건이라면 더욱 힘들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실업자가 속출하고 기업들은 연이어 도산하는 판국에 불법체류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Exodus(대탈출)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또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 와중에 Jin Harmony 제16회 정기연주회의 지휘를 맡기로 결정하고 구체적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가져온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주요 테마로 설정하고 연주회의 골격을 잡아나갔는데 처음 의도와는 달리 한 Stage가 아닌 전 연주회가 기독교 음악으로 선곡되었다. 그 즈음 지하 예원의 소파신세를 면하고, 연습실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숙소를 옮기면서 2년 만에 다시 Jin Harmony의 지휘봉을 잡았다. C.C.M.의 특징이 대중적인 교회음악이어서 그런지 단원들이 신명나게 연습을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3월 학기에 맞춘 입국수속은 같이 병행이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선배 층들은 IMF의 영향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으니 몹시도 불안해들 하고 있었다. 모두들 시국의 하 수상함에 함께 진저리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동요가 일고 얼어붙은 경제로 인해서 문화계 전반에 불어 닥친 냉기류는 싸늘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경우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심하게 타격을 입는 것은 문화계일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줄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Jin Harmony의 제16회 정기연주회 역시 그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자들의 수고와 의지로 또 한 번의 연주회는 그렇게 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휑한 하늘을 우러르며 수고하는 이들을 생각했다.

자랑스러움, 사랑, 안타까움의 전율이 슬픈 곡조로 마음에 흐른다.

아무리 꿈을 향한다고 하지만 이들을 두고 다시 떠나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내심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지 못하게 되기를 바랬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이태리를 가고 싶었기에 그랬었고, 잠깐이지만 미국생활을 통해 느낀 것이 있어서 그러했었겠지만 미국은 그렇게 살갑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목사님이 애써 주신 덕분에 서류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고 또 한 번의 미국비자 인터뷰 신청을 했다. 계란으로 다시 한 번 바위를 친 것이다. 연주회를 며칠 앞두고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 기대가 적으면 마음도 편한지 내 인터뷰 순서를 별 긴장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순서........


한참동안 서류를 보던 영사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질문을 할까하고 살짝 긴장하려는 순간, 한 마디만을 남기고 다음 순서가 호명되었다.


“Good Luck!"


비자 신청자들이 추풍낙엽처럼 거부되어지던 그 날, 5년짜리 미국행 학생Visa가 내게는 또 그렇게 쉽게(?) 나오고야 말았다.


예정대로라면 연주회 다음날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연주회까지의 나날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음악과 같이 하고 그리운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리라!

1998년 2월 21일

세상사에 찌들고 볼품없는 몸뚱아리 고운 연미복 속에 감추우고 그리운 문화회관의 무대에 올랐다.

Jin Harmony 제16회 정기연주회의 막이 오른 것이다.


우리들만의 남성합창, 동래여고 출신 ‘예사랑’ 팀과의 혼성합창 그리고 전체가 함께하는 Final Stage - 긴장과 이완, 설레임과 아쉬움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관중들과 하나 되어 일체감을 맛보았고 이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는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PSB 방송에서 2시간동안 연주 실황을 방송하는 등 또 한편의 살점, 정기연주회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1) 요나(Jonna) :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서 하나님이 지시한 사명을 어기고 어긋난 길로 도망가다 결국은 본분을 깨닫고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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